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2007 전국영화상영자대회’는 독립영화, 예술영화, 고전영화 등 다양한 영화의 원활한 상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다. 1980년대 일본에서 미니시어터 붐을 불러일으킨 주역 중 한명인 호리코시 겐조(62)는 이 행사를 위해 초청된 아주 특별한 손님. 일본커뮤니티시네마지원센터 사무국장인 이와사키 유코와 함께 한국을 찾은 그는 현재 25년 역사의 미니시어터 유로스페이스의 대표이자, 동시에 도쿄영화미학교 대표이사,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영상연구과 교수, 커뮤니티시네마지원센터 이사로도 일하고 있다. 미로비전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로프트>를 제작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한 그는 “도쿄예술대학의 경우 한국영화아카데미와 교류를 맺고 올해 2편의 단편을 공동으로 제작했는데 한·일 양국 학생들이 영화도 만들고 영화 같은 연애도 꽤 나눴다”는 여담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1970년대 말 일본에서 시네클럽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본격적인 활동은 1977년에 독일신작영화제 개최다.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초크 등의 초기 작품들을 상영했다. 당시에 영화제라고 하면 이미 개봉했거나 아카이브에 있는 작품들을 모아서 상영하는 형태였는데, 난 직접 독일에 가서 5편을 골랐다. 500석 규모의 지역주민센터 같은 곳에서 상영했는데, 도와주는 이가 없어서 혼자서 자막 만들고 표 팔고 영사기 돌렸다. 매진도 꽤 됐지만 판권 구입을 공식적으로 했던 터라 결국 1천만엔 정도 빚을 졌다. 일단 은행에서 돈 빌리고 운영하던 여행사 자금을 끌어다 쓴 다음에 지역 순회상영에 들어갔는데 극장주들이 숙소랑 술은 내주면서도 영화상영은 거절하더라. (웃음)
-독일영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었나. =그전에 독일에서 3년 동안 산 적이 있다. 독문학을 전공한 뒤에 프랑크푸르트에서 3년 정도 머물렀다. 1968년이니까 뭐 독일영화가 아주 대단한 기세를 떨칠 때는 아니었고. 다만 68혁명의 분위기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대학 다닐 적에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병원에서 잡일을 하면서 생활했는데 그때 한국에서 온 간호사들한테 신세를 많이 졌다. 같은 기숙사에 10명 정도의 간호사가 있었는데 같은 동양인이라고 빨래도 해주고 먹을 것도 챙겨주고 그러셨다. 아마 지금 세대는 그분들의 땀의 의미를 잘 모를 거다. 어쨌든 그런저런 인연으로 그 이후에도 계속 독일영화에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 있었던 것 같다.
-1982년에 유로스페이스를 만들었다. 직접 극장을 차린 이유는 뭔가. =영화상영이 원활하지 않으니까 직접 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미니시어터라고 할 만하다. 처음에 <무기력한 시간>이라고 마그레타 폰 트로타의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작을 틀었는데 관객이 달랑 4명이었다. ‘4’자와 무슨 인연인지 한동안 관객이 달랑 ‘4명’이었다. (웃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장이모, 차이밍량, 레오스 카락스, 에릭 로메르, 피터 그리너웨이, 존 세일즈, 스파이크 리, 페드로 알모도바르, 라스 폰 트리에 등의 영화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상영했다. 이렇게 말하면 자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돈이 없어서 이미 거장이었던 이들의 작품은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이야 다들 스타 감독이 돼서 유로스페이스를 배신하고 갔지만. (웃음) 프랑수아 오종은 단편 때부터 상영을 해서 아직도 날 보면 파파라고 하는데 영화는 안 준다. 아직도 우리하고 관계하는 감독은 두 사람 정도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랑 아키 카우리스마키. 이 둘은 아직 일본에서 히트작이 없어서.
-미니시어터는 1960년대 말에 생긴 이와나미홀도 있지 않나. 최초라고 하기엔 좀. =이와나미홀을 운영하신 분이 다카노 에쓰코다. 그런데 그분 앞에서 이와나미홀을 미니시어터라고 했다가는 혼난다. (웃음) 규모는 작지만 국내외 큰 배급사들과 거래하던 극장이니까.
-유로스페이스를 시작으로 1980년대 미니시어터 붐이 일었다고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시대 분위기와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젊은이들의 문화는 소수가 즐기는 아방가르드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 하위문화에 대한 좀더 폭넓은 관심이 대두됐다. 제각각 따로 흩어져 있던 젊은 인력들도 영화쪽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게 미니시어터 붐으로 나타난 것 같다. 아지트 역할을 한 거지. 지금이야 미니시어터를 찾는 관객은 영화만 보러 오지만, 그때는 오늘은 영화, 내일은 공연 뭐 이런 식으로 몰려다녔다. 아오야마 신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과 같은 영화인텔리도 미니시어터 때문에 가능했다.
-부가판권 등이 있으니까 한국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겠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일본 또한 예술, 독립영화 시장이 많이 줄어들었을 텐데. =1980년대는 지금은 거장으로 빛나는 이들이 막 꿈틀대던 때라 미니시어터 입장에서도 굉장히 행복했던 시기다. 지금 관객 수는 절반으로 줄었는데, 아마도 그만한 재능들이 더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미니시어터 입장에서 대중성을 좇을 수도 없다. 기존 관객마저 발길을 돌리니까. 영화를 즐기는 관객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이해하는 관객을 늘리는 게 우리 극장의 목표이자 프로그램 선택 기준이다. 이렇게 말하면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보 관객이 많아지면 바보 영화도 많아진다. 멀티플렉스가 그런 악순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지방으로 갈수록 더 그렇고. 당장 효과를 낼 수 없지만 관객 육성을 위해 작가들의 영화를 제작하는 일도 꾸준히 할 것이다. 한국과의 교류도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단순하게 말하면, 아키 카우리스마키든 김기덕이든 허우샤오시엔이든 그들의 영화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세 나라 정도가 있으면 제작이 가능하다.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100만달러면 된다. (웃음) 일단 한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에 그들의 영화를 보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정보 공유부터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