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아나운서는 현재 세계 으뜸일지도 모르는 다재다능 혹은 다중인격을 요구받고 있다. 특히 일등 신붓감이나 희망 직종에서 빠지지 않는 여성 아나운서들은 요리조리 뜯어보고 평가하는 시청자들의 올가미 같은 시선에 딱 걸려 있다.
아나운서들이 예능프로그램에 둥지를 튼 게 하루이틀 지난 얘기가 아니고, 우리의 특수상황도 아닌데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아나테이너’라는 화두는 여전히 뜨거운 온도를 뿜어내고 있다. 아나운서의 아이덴티티 논란이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대세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게 예전과 달라졌다면 달라진 모습. ‘아나테이너’라는 조어의 주인공들은 특집용이나 보조용이 아닌 전면배치용이 됐고, 뉴스, 교양프로그램 등 ‘고상한’ 영역과 오락프로그램 등 ‘즐거운’ 분야로 아나운서의 전문성을 특화하던 관례도 부수고 있다.
그렇다고 오늘의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들이 프리랜서 예능인들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 나, 운, 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채시험, 내부경쟁 같은 치열한 관문을 거쳐야 하고, 부침 많은 연예계의 룰에 한순간 진탕 소비됐다가 언론인의 목표와 멀어지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도 갖고 있다. 때문에 예능프로그램에 투입되고 있는 아나운서들은 ‘현재는 자신의 다양한 능력을 검증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유보의 학습자 태도를 나타낸다. 그럼에도 그 길에 마음을 다 바쳐 투신한 예능인보다 방송사라는 막강한 조직을 등에 업고 심플한 절차를 거쳐 프로그램의 메인 자리를 따내고 있는 것도 사실. 최근에는 아나운서국(팀)이 몰아치기 캐스팅, 학창 시절 사진 공개 같은 사생활 마케팅까지 지휘하며 매니지먼트사 뺨치게 스타아나운서 만들기에도 적극적이라 유명세라는 엔터테인먼트 세상의 달콤한 열매를 단시간에 맛보고 있다.
MBC <지피지기>에서 패널로 전면배치된 여성 아나운서들.
반면, 연예인들에 비해 많은 행동 강령도 준수해야 한다. 4인의 여성아나운서를 토크쇼 <지피지기>에 단체로 내세우는 등 아나테이너의 시류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 MBC아나운서국 ‘짱’의 발언만 엿봐도 그 업무수행이 참 어렵겠다 싶다. 아나운서와 연예인은 달라야 한다는 큰 전제 아래 표준 한국어를 구사하고, 선정적이지 않아야 하며,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과장과 거짓을 섞지 않는 가운데 위트와 유머를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원더걸스의 <텔미> 춤을 따라잡고, 예쁜 옷을 입은 채 연예인들과 섞여 있어도 ‘아나테이너’들은 그리 ‘엔터테이너’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반듯한 형식미를 띠는 것에는 대찬성이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즐거움의 방식과 내용이 무슨 근거인지 모를 ‘난 달라’의 강박관념과 차별성에 갇혀 있는 것은 이상한 풍경이다. <지피지기>나 <도전 예의지왕>이 공주마마 같이 앉아 있는 아나운서들을 활용하는 주무기는 기껏해야 남자 게스트들한테 ‘어느 아나운서가 이상형에 가깝느냐’, ‘연예인과 아나운서 중 누가 예쁘냐’ 따위의 질문을 던져 답을 구하고 아나운서의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여성아나운서의 <텔미> 춤이 개그우먼의 그것보다 더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한 특별우대가 모두에게 동의를 얻을 것이라는 믿음 등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세상만사의 캐릭터 전시장이면서 놀이터인 방송은 누구나 즐거움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게다가 요즘은 변호사, 의사 같은 비연예인이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게 신기하지 않은 전 국민의 엔터테이너화 시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가치와 시청자들의 지지도가 얼마나 바탕에 깔려 있느냐는 점일 터. 현재 아나운서의 지분 확장은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벌어지고 있는 시청자 동원 실험과 밀어붙이기의 인상이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