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열전2>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장진 연출의 <서툰 사람들> 연습현장.
지난 11월15일, 남산 드라마센터 5층 연습실. 말 많은 도둑과 “돈 훔칠 의지를 꺾어버리는” 여자의 숨가쁜 대화가 진행 중이다. 듣고 있자면 도둑은 도둑 같지가 않고, 여자는 피해자 같지가 않다. “이건 완전히 손만 묶여 있지 실권은 지가 다 장악하고 있네. 이거 어디 도둑질할 맛이 나야 뭘 해먹지. 뭐? 비상금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아 예, 어디다 꼬불쳐놨는지도 가르쳐주지 왜?” “아닌 게 아니라 저 책장 맨 오른쪽 백과사전에 있어요.” 장진 감독이 다시 본업인 무대로 돌아와 연출하는 <서툰사람들>은 제목 그대로 자기일마저 서툰사람들의 하룻밤 만남을 포착한 연극이다. 한동안 그의 영화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덕배, 화이와 재회하는 자리이자 장진 감독이 군대 시절 쓴 극본을 10여년 만에 다시 만져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공연이 20여일밖에 남지 않은 탓인지 장진 감독의 마음은 타들어가는 듯했다. 덕배와 화이를 맡은 강성진과 장영남의 연기를 지적하는 말이 꽤나 가열차다. “대사가 나오기 전에 동작이 먼저 나오잖아요. 집중력도 없고 에너지가 많이 떨어졌어요. 그리고 상대가 뭘 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해주세요.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 정도의 시기에는 그런 게 돼야죠.” 아마도 장진 감독만의 개인적인 공연이었다면 부담이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툰사람들>이 막을 여는 12월7일은 장진 감독이 지난 2004년 <택시드리벌> 이후 3년 만에 무대에 복귀하는 날이자, 앞으로 1년간 15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연극열전2>가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장진 감독 자신도 사안의 중차대함을 알고 있다. “<서툰사람들>이 어떤 성과를 보여주냐에 따라 <연극열전2>의 이후 작품들이 힘을 받을 것이다. 연습을 시작할 때는 자신이 있었는데, 날이 갈수록 입이 타들어가네. (웃음)”
4년 만에 <연극열전2>로 다시 만나다
<연극열전2>는 지난 2004년, 15편의 작품으로 80%에 이르는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며 1년 동안 총관객 17만명을 불러모았던 <연극열전>이 부활한 프로젝트다. 1회와 마찬가지로 동숭시어터컴퍼니의 홍기유 대표가 전체적인 판을 짰고, 여기에 배우 조재현이 프로그래머로 가세했다. 포스터에 “조재현 프로그래머 되다!”라는 카피가 명시되어 있을 만큼 <연극열전2>에서 조재현의 역할은 크다. 그는 라인업을 짜고, 작품을 제작하고, 홍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배우 캐스팅까지 발로 뛰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에는 연극과 영화를 오가던 배우뿐만 아니라 무대에 한번도 올라서지 않았던 배우까지 무대에 오르며, 역시 연극을 연출한다는 게 다소 낯설게 느껴질 만한 영화감독들이 메가폰 대신 육성으로 참여한다. 이순재, 나문희, 윤소정, 문성근, 이한위, 황정민, 박철민, 추상미, 류승룡, 유지태, 고수, 한채영, 장영남, 지진희가 <연극열전2>를 위해 2008년의 스케줄을 앞당겨 짰고, <화려한 휴가>를 연출한 김지훈 감독이 극단 차이무의 레퍼토리인 <늘근도둑이야기>를 연출한다. 또한 박진표 감독과 문소리도 현재 작품 선택을 놓고 고심 중이다. 조재현 프로그래머는 “같이 연극을 하자는 말에 반응이 시큰둥할 사람이면 아예 제의를 하지도 않았다”며 “인지도 있는 좋은 배우들의 참여가 새로운 연극 팬들을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연극의 맛’을 관객에서 보여드립니다
<연극열전>의 ‘열전’은 ‘열전’(列展)이자 ‘열전’(熱戰)을 뜻한다. 아마 대학로 한켠에서 수군거리듯 “연극계의 발버둥”이라는 말이 그럴듯할 것이다. 그만큼 <연극열전>은 그동안 대학로를 중심으로 이어온 한국 연극이 새로운 변화를 꾀하는 시도의 첨병에 서 있는 프로젝트다. 기자들을 불러모아 제작발표회를 열고, 연습 현장을 공개하는 등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방식으로 연극을 마케팅하는 일은 약 5년 전만 해도 대학로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또한 순수예술의 꼿꼿한 오기를 반쯤 접고, 관객을 향해 한 발짝 내디디는 발걸음도 기존 연극계가 품고 있던 선입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관객이 찾을 수 있는 재미와 연극만의 재미를 고려했다”는 조재현은 “80년대 관객은 인내심을 가지고 객석에 앉아 있었지만, 현재의 관객에게 그런 인내심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연극열전>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기존의 연극배우가 아닌 대중적인 스타를 동원한다는 것을 두고 다른 연극들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우려도 있고, 기초예술의 순수성을 갉아먹는 행위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변화를 꿈꾸는 대학로의 젊은 연극인들은 “그렇게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술만 마시고 괴로워하기만 했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후회한다. 조재현 프로그래머 또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단 관객에게 연극이 재밌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러려면 등을 돌리고 있는 관객을 찾아오게 해야 한다. 인지도 있는 좋은 배우들을 보고 극장을 찾아온 관객이 연극도 재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후에는 다른 연극들을 찾게 될 것이다.”
영화 감독과 배우 참여로 관객에게 좀더 가까이
대학로가 변화를 시도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영화 발전이 가져온 자극도 만만치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홍기유 대표는 “한국영화는 르네상스가 있었지만, 한국 연극은 한번도 르네상스를 맞이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특히 지난 1997년, 대한민국을 찾아온 IMF는 대학로를 잠재웠다. 많은 극단이 이삿짐을 꾸렸고, 기획자들은 다른 매체로 향했고, 배우들은 돌아온다는 기약없이 방송과 영화로 진출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한국영화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가 호황의 발판이었다. 장진 감독이나 김지운 감독 같은 연극계의 인재가 영화로 진출한 것은 물론이고, 송강호, 설경구, 문소리 등의 걸출한 배우를 끌어안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경험 많은 연극 인력들이 당시 붐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연극영화과의 지도교수로 흘러간 것 또한 대학로를 침체일로에 빠지게 만든 계기였다. 지난 2003년, 동숭시어터컴퍼니와 극단 차이무, 이다가 연합하여 만든 ‘생연극시리즈’와 이듬해 비로소 막을 연 <연극열전1>은 그런 침체 속에서도 활기를 되찾자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물론 그런 의지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여기서 버틴 사람들은 연극해서 번 돈으로 아파트 관리비 내고, 애들 학원비를 냈다. <연극열전>을 통해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애를 위로하고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생각도 있었다”는 홍기유 대표의 말은 <연극열전>의 또 다른 결의를 드러낸다.
하지만 굳은 결의만으로 1년짜리 대형 프로젝트를 꾸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극열전1>은 공연 전부터 열전이었다. 홍기유 대표와 대학동기인 장진 감독이 함께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주목받은 대표작 3, 4편을 선정하고 문예진흥원이 발간하는 연감을 뒤적이며 라인업을 구축했다. 지난 20년간 한국 연극사에 의미를 가져온 작품들을 공연하자는 의도였지만,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20대 시절 감동받았던 작품들을 다시 보고픈 생각도 있었다. <에쿠우스> <백마강 달밤에> <한씨연대기> <관객모독> 등 15편의 작품이 꾸려지자 이번에는 돈이 문제였다. 안 그래도 침체된 연극에 투자하려는 사람은 없었고, 민간축제라 지원금을 받기도 어려웠다. 홍기유 대표와 장진 감독은 기획서를 들고 문화관광부를 찾았지만, 돌아온 말은 “지원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결국 홍 대표가 모 제약회사의 홍보부에 있는 친구를 붙잡아 5천만원을 받아냈고, 시스템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티켓예매사이트에서 돈을 빌리고, 기존의 자금을 쏟아부으면서 만든 4억여원의 자금이 밑천이었다. 첫 공연 이후에는 “밑돈 빼서 윗돈을 막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한편의 공연수익이 고스란히 다음 작품의 제작비로 쓰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갖은 고충 끝에 막을 내린 <연극열전1>은 대차대조표에서 3억5천만원이란 빚을 남겼다. 주최쪽은 왜 일을 벌였을까 싶은 회의에 빠졌지만, 외부적인 평가는 달랐다. 우선은 연극인들이 “고용창출의 기회였다”고 농을 던졌다. 한동안 손을 놓고 있던 연극인들에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그렇게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결집하면서 발생하는 힘이 <연극열전1>의 이후를 가능케 한 것이다. 특히 <관객모독>을 올린 극단76은 <연극열전1>을 발판 삼아 이후에도 장기공연체제로 들어갔으며, 올해 6월에는 양동근이 연출로 참여한 힙합버전 <관객모독>을 무대에 올렸다. 게다가 <연극열전1>은 또 다른 ‘열전’을 불러일으켰다. <여배우열전> <뮤지컬열전> 그리고 <연극, 수작걸다> 등 장기적, 단기적 프로젝트들이 <연극열전1>을 벤치마킹해 탄생했다. 홍기유 대표는 “뿐만 아니라 연극의 생명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던 프로젝트였다”고 말한다. “<에쿠우스>같이 인간과 우주에 대해 해석하는 작품은 생명력이 무궁무진해 보였다. 하지만 <백마강 달밤에>나 <불 좀 꺼주세요>처럼 90년대 초반에는 센세이션했던 작품들도 2000년대 관객은 외면하더라. 그만큼 관객과 시대의 변화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2년마다 열리는 축제의 장으로 성장 준비
<연극열전>은 2회를 맞아 다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연극열전1>이 과거 한국 연극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연극인들을 결집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면 <연극열전2>는 관객과의 소통과 새로운 작품의 개발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난 11월19일, 사업자 등록증을 받은 <연극열전>은 이제 격년으로 열리는 프로젝트로 재탄생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후에는 해외 작가와 연출가를 초청하는 큰 그림도 그리고 있다. 타 매체의 인력들을 참여시켜 한국 연극의 질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 또한 <연극열전2>의 또 한 가지 목적이다. 홍기유 대표는 <연극열전2>가 “한국 연극이 좀더 세련된 모습을 갖추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장진이나, 김지훈이나, 박진표나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니까 관객을 불러모으는 감독들이다. 그들은 비주얼을 고민하고 연극보다 큰 스케일을 운영하는 치밀함도 가지고 있다. 앞으로의 연극도 복제예술이 가진 장점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간다면 기존의 연극인들에게도 자극이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연극열전>은 침체를 벗어나려는 연극계의 발버둥이자 시대의 변화를 체감한 연극계의 손짓이다. 과연 <연극열전2>은 1년 뒤, 어떤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낼까. 주최쪽에 또 다른 빚더미를 안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영화가, 그리고 문화계 전체가 대학로를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로는 충분할 듯 보인다. 한국 연극의 발버둥은 이제부터 더욱 격렬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