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관련된 글을 써오면서 가끔씩 느끼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좋은 소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쉽(지만 기분은 좋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의 밀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음악의 밀도, 라고 하니까 왠지 거창하게 들리는데 같은 라면도 끓이는 사람에 따라 맛(밀도)이 다르다는 세상 이치와 별 다를 게 없다. 라면의 맛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감지할 수는 있으나 설명하기는 어렵다. 굳이 이런 직업적 애환을 넋두리하는 까닭은 이제부터 루시드 폴의 새 음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시드 폴의 신작 <국경의 밤>은, 평론가들이 잘 쓰는 용어를 빌리자면 ‘범상한’(mediocre) 음반이다. 이 형용사를 언급하는 것이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에게나 즐거운 일은 아닌지라 이리저리 말을 돌려보려 애써 보기는 했지만 이 단어가 모든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이 음반은 평온한 음반과 지루한 음반 중 후자에 가깝고 아름다운 소리와 잘 만든 소리 중 후자에 속하며 예민한 감수성보다는 통속적 상상력에 더 많은 지분을 내주고 있다. 전작 <오! 사랑>(2005)에서도 이런 점을 지적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보는 쏠림이 더 심해진 것처럼 들린다.
여기서 예의 그 밀도 얘기가 나온다. <국경의 밤>에 담겨 있는 음악은 우리에게 익숙한 루시드 폴 브랜드의 음악이다. 물 위라도 걷는 것처럼 사뿐한 목소리로 부르는, 늦가을의 하늘마냥 청명하고 명징한 포크송 말이다. 그러나 <국경의 밤>에서 그 하늘은 관광지에서 파는 엽서 사진 속 하늘 같다는 인상이 강하다. 타이틀곡 <사람이었네>를 비롯하여 유달리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Kid>, 동굴 속에서 꾸는 꿈 같은 <당신 얼굴, 당신 얼굴> 등 음반의 곡들은 딱히 흠잡을 곳이 없지만 ‘바로 이것이다’라는 느낌도 없다. 무심한 듯 나긋나긋하면서도 서늘한 긴장감으로 귀를 잡아당기던 초기 루시드 폴의 마법은 <국경의 밤>에서 들리지 않는다. 가사도 마찬가지다. 음반의 가사는 누구에게나 호소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과 상징과 상황설명으로 꾸며져 있지만 그 때문에 누구의 심장에도 직접적으로 가닿기 어렵다. 뭔가 많은 것들을 담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정작 건져올린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무지개>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라오스에서 온 편지>).
나는 루시드 폴의 음악적 재능에 대해서는 큰 의문이 없다. 그는 훌륭한 작곡가이며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국경의 밤>에서 루시드 폴이 자신의 재능을 ‘팬시’(fancy)하게 남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만큼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학업을 마치고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까. 그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