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광고 대행사를 잠시 다닌 적이 있다.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첫 기초의회 의원선거였는데, 사업을 하다 정치무대에 나서려는 한 클라이언트를 유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방 정치에 대한 뚜렷한 소신은 거의 없어 보였다. 도드라진 지역 활동 경력이 있지도 않았다. 인상이나 말솜씨도 별로였다. 그는 그저 “알아서 잘해달라”고만 했다. 과연 이길까? 선거운동 과정을 함께하면서 승리를 예감했다. 달랑 포스터 한장만으로도 그 근거는 충분했다. 돈을 꽤 들여 멋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서 세련된 각도와 포즈로 찍은 인물사진 밑엔 친근함이 물씬 풍기는 카피가 눈길을 잡았다. “사촌보다 좋은 이웃.” 정말 사촌보다 좋은 이웃으로 어필할 것만 같았다. 얼마 뒤 그 후보가 당선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거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이미지 조작!
아기 다다시의 원작만화 <신의 물방울> 초반부엔 두 남자가 대결을 펼치는 장면이 나온다. 맥주회사 영업사원인 칸자키 시즈쿠와 젊은 와인평론가 토미노 잇세의 ‘와인 결투’다. 와인을 마신 뒤 그 맛과 향을 더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는 자가 유산을 물려받는 싸움이다. 혀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치열하고 현란한 수사의 대결을 감상하면서 정치광고가 떠올랐다. 후보자의 정치철학적 맛과 인격적 향기를 정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카피가 얼마나 될까 해서 말이다.
단어 몇 가지의 조합만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광고 문안이나 신문·잡지의 헤드라인을 뽑아본 사람이라면 안다. 짧고 압축된 문장에 의미를 농축하는 고통을. 그리고 그 짧은 문장 한줄이 전체 문맥의 뉘앙스를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는 사실도.
잡지 한권을 예로 들어보자. 독자들은 헤드라인을 먼저 읽은 뒤 본문 텍스트를 읽을지 말지 결정한다. 마치 소믈리에의 절제되고 조리있는 와인평을 듣고 무엇을 마실까 고르듯 말이다. 따라서 신문·잡지 헤드라인의 기본은 텍스트의 핵심과 특징을 간파하는 정확성이다. 텍스트의 매력이 헤드라인에 고스란히 담길 때 편집자는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딜레마가 존재한다. 모든 텍스트가 고급 와인처럼 그윽한 향기를 지니지는 않는다. 동네 슈퍼에서 파는 싸구려 샴페인 같은 제품이 나오기도 한다. 그때 편집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마셔봤자 입만 버린다고, 읽지 말라고 해야 하는가? 텍스트가 밋밋하고 함량 미달이면, 헤드라인도 밋밋하고 함량 미달이어야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텍스트를 멋진 헤드라인이 보완해주기도 한다. 심심한 텍스트가 기발한 헤드라인으로 인해 빛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신문과 잡지의 헤드라인을 뽑을 때 약간의 과장은 양념이라는 위험한 확신을 갖고 있다. 뻔한 헤드라인을 선택할 바에는 가끔 펀(fun)하게 뻥을 치는 게 낫다. 헤드라인의 귀여운 오버는 오히려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활력을 선사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독자들이 헤드라인에 속아 글을 열심히 읽는다 해서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
그렇다. 헤드라인에서 약간의 뻥은 떡국의 후추이며, 파스타의 소스라는 믿음으로 올 대선 주자들의 포스터 헤드라인을 본다. “국민성공시대.” “가족행복시대.” 아,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는 주식으로 떼돈을 벌겠구나. 정동영 후보가 되면 온 가족의 행복을 위한 차별없는 성장시대가 열리는구나. 성공과 가족행복 중 무엇을 선택할지 급(急)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뻥이다. 그래도 양념이다? 아니다. 독이다. 왜냐? 헤드라인에 묻힌 본문 텍스트(후보 개인) 내용을 찬찬히 찾아 읽어보면 심하게 사기당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뭔가 그럴듯한 좋은 이미지를 후보에게 투영해 유권자를 현혹하려는 꼼수가 보인다. 선정적 헤드라인에 속아서 산 신문이나 잡지는 아무리 비싸도 1만원을 넘지 않게 마련이다. 반면 정치광고의 헤드라인에 잘못 속으면 5년을 고생한다. 이렇게 비판해봤자 ‘성공’과 ‘가족행복’이라는 컨셉은 ‘이미지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할 거다. 한두푼 주고 만든 광고가 아니잖은가. 그게 현실의 선거판이다.
유권자가 참여하는 대선 후보 헤드라인 뽑기 콘테스트를 상상해본다. 앞에서 언급한 <신의 물방울>의 와인 결투처럼 말이다. 후보들에게서 느껴지는 ‘맛과 향’을 가장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는 이에게 상을 주자. 5자 부문, 10자 부문으로 글자 길이를 나눠서 해도 재밌겠다. 내가 그런 이벤트에 참여한다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이명박 후보에게 이런 헤드라인을 붙이고 싶다. “썩어도 준치.”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자.” 정동영 후보에게는 “견적 좀 내주세요” 같은 헤드라인이 좋겠다. 도통 지지율의 견적이 안 나오니 말이다. 앗, 뒤늦게 합류한 이회창 후보에게는? 음… ‘와장창 좌익척결’ 정도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