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매. 요즘 김씨 봤수?” “요즘 통 들르질 않네.” “전화 연락도 없고?” “나도 몰라. 다들 철수하는 마당에 떼돈 벌겠다고 월남에 갔을 리는 없고.”
충무로 단역배우 오칠성씨. 아침부터 충무로 일대를 뒤졌는데, 당최 김씨를 찾을 수가 없다. 충무로가 불황이라 엑스트라 모집도 드문드문. 동갑내기지만 평소 형처럼 의지하던 김씨와 신세한탄하며 소일할까 했는데 그의 짱구머리를 못 본 지 벌써 1주일째다. 항아리다방에도 없고, 국제다방에도 없고, 그럼 어디에 있담. 단역배우들의 집합소인 국제다방, 불국사다방, 영산다방까지 모조리 뒤졌고, 오늘은 스타부터 단역배우들까지 가리지 않고 ‘비상연락소’로 사용하던 청맥다방까지 들렀는데, “충무로의 개인비서”라는 별명이 나붙은 청맥 아줌마마저 도리도리니, 정말이지 별 도리없다. “오형, 요즘 밥은 먹고 살아?” 돌아보니, 세기상사 작품을 도맡아 한다고 언제나 뻐기던 이씨. 평소엔 그의 넉살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는데, 짝도 없으니 꼼짝없이 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견뎌야 할 듯하다. 인상 찌뿌릴 수도 없어 ‘어어’ 하는데, 이씨 왈, “오형도 힘 좀 보태야 해. 안 그러면 평생 단역이라고 설움받는다고.” 이씨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가히 분노할 만했다. 세기상사가 엑스트라들에게 출연료 대신 극장표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새벽종이 울렸는데도 충무로는 반대로 극심한 보릿고개였다. 신필름과 함께 메이저라 불리던 세기상사가 김무현 감독의 <대합실의 연인>, 임원식 감독의 <대감신랑>, 박종호 감독의 <안개부인> 등에 출연했던 단역배우들에게 현금 대신 극장 입장권을 지급해 물의를 빚었던 사건은 권세 10년을 누린 충무로가 한국전쟁 직후의 배고픈 시절로 돌아갔음을 단적으로 의미했다. 1972년 3월 <영화잡지>에 따르면,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는 한통의 진정서를 받았는데, 위 영화에 출연했던 단역배우들이 “출연료 1만원을 받아야 됨에도 현금 대신에 대한극장에서 상영 중이었던 <의사 지바고> 입장권 2장을 포함, 45일로 된 연 어음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개런티 3만원을 받아야 할 모씨 또한 세기상사 주식 1장- 시가로 1400원- 과 255원짜리 입장권 4장을 받았고” 나머지 금액은 “54일짜리 연수표”를 받아들어야 했으니 참을 수만은 없는 일. 영화사 입장에선 돈을 떼먹은 게 아니라 했지만, 일당 받아 생계를 연명해야 하는 단역배우들은 약속어음의 일종인 연수표를 받고서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에 이른다. 생각해보라. 배는 꼬르륵거리는데, 한가로이 극장에서 번드르르한 외화를 감상할 여력이 있을까.
진정을 통해 영화인협회가 대대적인 조사에 나서는 것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1970년대 중반 들어서도 못된 자린고비 제작자들의 횡포는 줄어들지 않았다. 스타감독들 또한 연출료를 연수표로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말이다. 김수용 감독은 언젠가 “우리집에 가면 연수표 한장이 있다. 나중에 그 제작자의 횡포를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서 바꾸지 않고 간직해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타감독에 대한 처우가 그러했는데, 힘없고 스탭들과 단역배우들의 처지야 어떠했을 것인가. 더군다나 편법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악용해 돈벌이를 하는 제작자들도 있었으니 이야말로 벼룩의 간 빼먹는 일이었다. 한 원로영화인은 당시 제작자들 중 모씨가 연수표를 받아든 스탭들과 단역배우들을 상대로 이른바 돈놀이를 해 짭짤한 수익을 거뒀다고 전한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의 스탭과 배우들에게 연수표로 돈을 지급한 뒤 당장 현금이 필요한 이들에게 연수표의 가치보다 덜한 현금을 내주는 식이었다. 힘없는 이들에겐 울며 겨자먹기가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A급 스타들이 겹치기 출연으로 돈을 쓸어모으고, B급 제작자들이 뒤판에서 돈을 긁어모아 불황을 견뎌낼 양식을 마련하는 동안, C급 영화인들은 하나둘씩 충무로를 떠나기 시작했다. 세어보면 말없이 충무로를 떠난 김씨가 어디 한둘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