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최소한 <스카우트>는 5·18이라는 소재에 전혀 짓눌리지 않았어요. 역사적 비극은 딱 이 정도에서 다루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김혜리: <화려한 휴가>와 달리, 그 시대에 산다는 것만으로 폭력적인 영향을 받고 비굴해지도록 강요 받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드라마에요.
부릅: <스카우트>는 김현석 감독의 세 번째 장편입니다. 각본만 쓴 영화는 역시 야구장이 나오는 <사랑하기 좋은 날>과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 있었고요.
마말: 김현석 감독의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어요. 착안점이 좋고, 영화의 온도를 잘 맞출 줄 알죠.
부릅: <스카우트>는 어깨에 힘을 빼고 상상에 힘을 주어 1980년 광주로 돌아갑니다.
마말: 여러 측면에서 <화려한 휴가>와 비교가 되죠. 최소한 <스카우트>는 5·18이라는 소재에 전혀 짓눌리지 않은 영화로 보입니다. 역사적 비극을 딱 이 정도에서 다루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어요.
부릅: 광주일고 3학년 선동열 선수를 스카우트하려는 소동과 5·18 광주항쟁이라는 두 이야기 줄기를 <스카우트>는 결합하고 있는데요. 임창정씨가 분한 야구 선수 출신 대학 교직원 호창은 말하자면 변두리의 인물이죠. 선동열 선수 스카우트도 자기 업무가 아닌데 얼떨결에 뒤집어쓴 경우고, 광주항쟁도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옛 여자친구로 인해 말려드니까요.
마말: 김현석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결국 ‘아이러니’를 말하려고 했을 겁니다.
부릅: 광주항쟁 일지를 각본화한 <화려한 휴가>와 달리 <스카우트>는 주변부 인물을 통해, 그 시대에 산다는 것만으로 폭력적인 영향을 받고 비굴해지도록 강요받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드라마예요. 광주항쟁 자체보다 그것이 상징하는 동시대인들 모두의 딜레마를 표현했죠. 야구부가 시위 학생을 진압하는 구교대로 동원됐을 때 호창은 희미하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부상 동료 선수가 학생에게 맞자 정신없이 배트를 휘두르잖아요. 그러다 마음속에서 뭔가 죽어버리는 거죠.
마말: 전 로맨틱코미디판 <박하사탕>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어요. 그런 딜레마와 그런 결론은 바로 김영호(설경구)의 삶을 운명지운 것이기도 했으니까.
부릅: 그렇군요. <박하사탕>은 남자가 변해버린 자신이 혐오스러워 스스로 애인과 연락을 끊는데 <스카우트>는….
마말: <스카우트>에 비해 <박하사탕>엔 자기 모멸의 감정이 아주 강하죠.
부릅: 사실 호창은 왜 여자친구가 떠났는지도 모르고 7년을 살잖아요? 내가 뭘 잃은 것 같긴 한데, 거기에 대해 별로 곰곰 생각을 안 해요. ^^
마말: 그 지점이 흥미로웠어요. “나는 완전 무개념이야”라고 스스로가 내뱉잖아요. ^^
부릅: 그런데 제가 <스카우트>에서 가장 석연치 않았던 지점은 결말이었어요. 이야기를 끌어온 호창의 시선이 사라지고 다른 인물의 회고만 남는데요. 불균형하다는 느낌은 저만 가졌나요?
마말: 저도 영화의 시작과 끝이 아쉬웠어요. 우선 첫 장면은 5·18을 염두에 두고서 일부러 마치 무슨 군사대책회의를 하는 듯한 톤으로 모 대학에서 선동열 스카우트를 명하는 회의장면이었는데, 의도는 충분히 납득되지만, 좀 조악하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보면 더욱.
부릅: 확실히 불필요한 트릭이었습니다.
마말: 마지막 장면은 ‘미소짓게 하는 후일담’에 대한 강박 내지는 관성이 영향을 준 것 같아요. 하지만 이호창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그대로 담겨 있는 설정일 테니까요. 사실 <색, 계>도 기본적으론 마찬가지잖아요? 내내 탕웨이의 시선으로 진행되다가 그녀는 죽고 엔딩은 이제까지 대상이었던 양조위의 시선이죠.
부릅: 탕웨이는 죽지만 호창은 훌쩍 사라지잖아요. 두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 그나저나 저는 김현석 감독님이 시집을 내시면 꼭 한권 사렵니다.
마말: <나는 비광>이라는 극중 박철민씨의 시 말인가요? ^0^
부릅: 네! <YMCA 야구단>에서도 호창(송강호)이 쓴 연애편지가 자결한 충신의 유언장으로 오인돼 큰 소리로 읽히는 장면이 있었죠. ^^ 정말 ‘낭독의 발견’이었습니다. 김현석 감독이야말로 문단에서 스카우트를 해야 할 듯.^_^
마말: <나는 비광>은 비광이 섰다판에도 못 끼고 고스톱판에서는 광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데에서 착안한 시죠. ^0^ 그런데 김현석 감독은 정통 고스톱만 치시나봐요. 우리 동네에서는 이른바 비광을 갖고 있으면 뭐든지 먹을 수 있는 ‘비광 고스톱’을 치거든요. ^^ 그 게임에선 비광이 최곱니다. 그러니까 우리 동네에서 <나는 비광>은 최소 조지 클루니 정도는 돼야 읊을 수 있는 시라고요.^.~
부릅: -.- 클루니님은 개봉작이 있는 다음주에 모시도록 하고요. 원신연 감독의 <세븐데이즈>는 아쉽게도 시사를 보지 못했네요. 다들 영화의 속도감을 많이 거론하던데요.
마말: 이 영화의 숏 수가 무려 3900개나 된다고 하더라고요. 초반 한동안은 적응이 안 될 정도로 핑핑 돌죠.^^ 기본적으로 영화 자체는 흥미롭게 봤습니다. 이야기도 결정적인 부분에서 명확히 아귀가 맞고요.
부릅: 미스터리스릴러로서 기본적 재미가 있군요.
마말: 이 영화의 스토리나 설정은 <올드보이>를 많이 연상시켰어요.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왜 풀어주느냐”에 있다는 것이 그렇고, 변호사인 주인공 지연(김윤진)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방식이 또 그렇죠. 영화는 지연이란 아주 뛰어난 변호사가 어느 날 딸 유괴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범인은 전화를 걸어와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살인범의 변호를 맡아 2심에서 무죄로 석방시키지 않으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요.
부릅: 데미 무어가 주연한 <주어러>도 생각나게 하네요.
마말: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도 잘 풀어냈고요. 그런데 곁가지에 해당하는 이야기의 서술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요. 게다가 숏 수가 말해 주듯 스타일 자체가 워낙 보는 이의 정신을 쏙 빼놓거든요. 그래서 중간 과정에서는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지 관객이 어리둥절하게 되는 순간이 자주 생긴다는 거죠.
부릅: 조금 가지치기하는 편이 나을 뻔했군요.
마말: 경우가 전혀 다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에 대한 일화도 생각났어요. 허우샤오시엔이 그 영화를 보고 대충 칭찬을 한 뒤에 그랬다죠. “그런데 이 영화는 형식을 먼저 만들어놓고 영화를 거기에 끼워맞춘 것 같아.” 화법이야 다르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요소는, 박희순씨의 연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지연을 돕는 형사 역을 맡았는데, 상당히 새롭고 입체적인 형사 캐릭터 하나를 만들었어요. 다혈질과 유머와 집념과 인간미를 함께 갖춘 형사인데 이 빡빡한 스릴러에서 유일하게 숨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김혜리: <이브닝>의 대사는 소설로 읽기는 아름다운데 배우의 입을 통해 나오면 조금 뜨악해진다는 약점이 있죠. 이동진: 로케이션과 촬영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로케이션이 캐릭터를 압도하는 측면도 있어요. 그런데 클레어 데인즈는 아쉽더군요.
부릅: 그렇다면 보고 싶은걸요? ^^ 마지막으로 명성 높은 여배우들이 떼로 캐스팅된 <이브닝>을 이야기해보죠. 늙어 임종의 침상에 누운 앤(바네사 레드그레이브/클레어 데인즈)의 회상과 환각이, 그녀의 딸들이 겪는 중년의 위기와 병치된 영화입니다.
마말: 진짜 중견 여배우들에 관한 한, 이보다 더 화려할 순 없더군요. *.*
부릅 ; 실제 모녀인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나타샤 리처드슨, 메릴 스트립-메이미 검머가 출연하고 극중에서는 글렌 클로즈가 검머의 어머니로 분합니다. 아시다시피 메릴 스트립과 주인공 클레어 데인즈는 <디 아워스>의 극중 모녀였죠.
마말: 맞다. ^^ <이브닝>을 보면서 생각나는 영화가 많았는데 특히 <빅 피쉬>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가 그랬어요.
부릅: 원래는 <디 아워스> 같은 모던한 필치의 여성영화를 예상했는데, 연애비극과 가족영화의 결합으로 끝난 감이 있죠.
마말: 저는 사실 <이브닝>을 그리 재미있게 보지 못했어요. 촬영도 좋고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인데 왜 그럴까 생각해봤죠. 가장 큰 문제는 구조 같아요. 과거와 현재를 계속 갈마들면서 영화를 진행시키는데, 그게 영화에서 전혀 논리도 없고 유기적인 매듭을 갖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애써 관객이 맘속에서 만들어낸 리듬까지 번번이 깨고 만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맥없고 찰기없는 드라마가 됐어요.
부릅: 사실 수잔 미노트의 원작 소설 자체가 ‘각색프루프’하기도 해요. 실제 대사와 내면의 목소리가 구분이 안 가고 대사도 따옴표 없이 지문과 어울려 나오죠. 이런 터치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옮기느냐가 관건인데요. 사실 모르핀에 취해 죽어가는 사람의 의식흐름이라는 게 장면화해 논리적으로 배열하기 쉽진 않겠죠. -_-
마말: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블랙 달리아>와 한줄에 서야 하는 작품일 수도 있겠네요.^^ 과거와 현재의 비중 문제도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재 분량은 대폭 줄여야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기본적으로 딸들의 이야기가 매력이 없거든요.
부릅: 대사가 소설로 읽기는 아름다운데 배우의 입을 통해 나오면 조금 뜨악해지는 것도 약점이죠. 촬영감독 출신인 라요스 콜타이 감독의 전작 <페이틀리스>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소년의 경험을 서정적으로 그린 특이한 홀로코스트영화였어요. <이브닝>과 공통점이라면 자기 운명을 통제하지 못한 인물의 이야기라는 점이겠죠.
마말: <이브닝>은 로케이션과 촬영에 신경을 많이 썼더군요. 로케이션이 캐릭터를 압도하는 측면도 있습죠. 그런데 클레어 데인즈는 아쉽더군요.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 때만 해도 상당히 장래가 촉망됐는데 말이죠.
부릅: 우리 세대의 스칼렛 요한슨 같은 위치였고, 초년에는 신세대 메릴 스트립 소리까지 들었던 걸로 기억해요. -_-
마말: 맞아요. 스칼렛 요한슨도 조심해야 한다니까. ^^
부릅: 하지만 앤이 꿈을 버리고 주부가 된 뒤 부엌에서 아이들을 노래로 달래는 장면은 좋았습니다. 남편의 도움을 못 받고 혼자서 허둥대다가, 끓어 넘치는 파스타 소스를 내팽개친 채 두딸을 무릎에 안아올려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요. ^_^ 이 대목에선 사실 <디 아워스>의 로라(줄리언 무어)가 겹쳐 보이는데, 아마 각색자이자 제작자인 작가 마이클 커닝엄의 영향 같아요. 로라는 커닝엄이 본인의 어머니를 모델로 썼다고 들은 적이 있거든요. ^^
마말: 저는 늙은 라일라(메릴 스트립)가 수십년 만에 죽어가는 앤을 찾아왔을 때 옆으로 누워서 죽어가는 자와 그 사람을 떠나보내는 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 참 좋았습니다.
부릅: 지난 봄 기회가 닿아 <이브닝>의 라운드 테이블 인터뷰에 참석했는데요. 메릴 스트립과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불참했음에도 그들과 관련된 질문이 가장 많았답니다.
마말: 죽은 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압도하는 형세였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