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우트>의 김현석 감독과 <타짜>의 최동훈 감독은 과거 같은 방에 죽치고 앉아 시나리오 심사를 함께했던 인연으로 이렇게 다시 만났다. 김현석 감독은 모범적으로 12시에 자고 7시에 일어났고, 반면 최동훈 감독은 밤새 일하다 아침 7시에 잠드는 타입이라 특별히 오래도록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시나리오 쓰는 사람’이라는 묘한 동질감이 컸다. 더불어 두 사람은 충무로에 꽤 드문 장르영화의 쾌감과 기발하고 참신한 화법을 좇는 패기 넘치는 젊은 감독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나리오에 대한 얘기로 입을 열었다.

최동훈: 나는 지금도 내가 시나리오작가라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김현석 감독이 늘 부러웠다. 소재를 발굴하는 솜씨도 좋고, 무엇보다 옛날에 썼던 시나리오들을 다 팔지 않았나. 난 당시 썼던 두 작품 다 안 팔렸다. 정말 부럽다. (웃음)

김현석: 1993년에 카투사로 군대에 가게 됐는데 당시 영화진흥공사와 스포츠서울이 같이 하는 공모전이 딱 하나 있었다. 그래서 작품을 하나 내고 군대에 갔다. 그러고는 얼마 있다 박종원 감독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작품이 본선에 올라 자기는 아주 많이 밀었는데 잘 안 됐고, 그래도 꼭 밀고 싶으니까 소개를 해주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한맥영화 김형준 대표님과 연결이 돼 <사랑하기 좋은 날>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1993년에 통화하고 1995년에 영화화가 된 거다.

최동훈: 그러고보면 나보다 한참 영화계 선배다. 난 1996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당선되면 캐시가 들어온단 생각에. (웃음) 자신감도 생기면서 돈도 벌고 영화계의 진입장벽을 한번에 무사통과할 거란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국 잘 안 됐다. 그거에 비하면 김 감독의 경우는 진짜 부럽다. 난 공모전 10번 떨어졌다. 그런 전화 받아본 적도 없고.

김현석: 두 번째 시나리오 <대행업>은 대종상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됐는데 명필름, 우노필름에서 연락이 왔다. 결과적으로 영화화는 안 됐는데 이후 명필름과 계속 작업하게 됐다. 각색작업을 하기로 했는데 읽어나보라면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시나리오를 건넸다. 그러더니 얼마 있다 이은 감독님이 쓰던 거 중지하라고 하셨다. 그거 가지고 영화 만들자고.

최동훈: 짧은 기간에 좋은 소식이 많았네. 정말 오늘 이 인터뷰하기 싫다. (웃음)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내가 연출부 시절에 본 영화인데 정말 재미있게 봤다. 사람들한테 그렇게 막 얘기하고 다니니까 다들 이상하게 보더라. 난 사람 기분 좋아지게 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 영화가 딱 그랬다.

김현석: 그 영화는 중학생들이 좋아한다. (웃음)

최동훈: 도대체 영화에서도 야구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된 건 어떤 이유인가.

김현석: 물론 야구를 좋아하지만 처음에는 나에게 개성이나 부여해보려고 장난삼아 시작했던 거다. 에로영화 감독 중에 박호태라고 있다. 그의 영화를 보면 항상 박호태라는 이름 옆에 빨간 하트가 있다. 그게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나에게 야구도 그런 거였다. 그렇게 야구 하면 내가 떠오르게 말이다.

최동훈: 깊은 의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하여간 참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웃음)

김현석: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라 그런 의도적인 개성 부여가 필요할 거라 봤다. 그런데 세 작품까지 만들고도 야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최동훈: 나 역시 그런 개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려고 사기꾼 영화를 시작했는데 두 영화 모두 그렇게 됐다. (웃음)

김현석: 사기꾼이 낫지 않나? 야구영화는 장사가 안 된다.

최동훈: 무슨 소린가. 사기꾼 영화를 만드니까 사악하게 쳐다본다. 개인적으로 나를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다음 영화에서는 도박이나 사기 같은 거 안 하려고 한다. (웃음) 게다가 야구영화 준비하면서는 실제 동경했던 야구선수들을 직접 만나서 좋지 않나. 선동열 감독 만났을 때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현석: 초상권 허락을 받으려고 올해 초 오키나와 전지훈련하는 곳을 찾아갔다. 문제되는 부분이 있으면 빼려고 시나리오도 들고 갔다. 만나자마자 ‘<YMCA 야구단> 다섯번 봤습니다’ 그러더라. 시사회 때 오셨던 건 알지만 그렇게 말해주니까 너무 기뻤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거의 15분 만에 ‘마음대로 하세요’ 그랬다. 난 시나리오 안 보여줘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속으로 ‘아싸!’였다. 왜냐하면 초고에는 선동열이 트로피 받는 장면을 실제와 다르게 전두환 대통령이 훈장을 주는 걸로 바꿨었다. 실제는 시상자가 외국인이었지만 바꾼 거다. 광주의 학살자인 전두환이 광주의 희망인 선동열에게 훈장을 준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래서 실제 장면과 합성해서 전두환이 그렇게 하는 걸로 CG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나리오 모니터를 해보니까 너무 정치적이라고 해서 거부감이 있더라. 그래서 CG작업을 중단시키기는 했다.

최동훈: 시사회 끝나고 나온 몇몇 인터넷 기사들을 보니 전두환과 관련된 얘기들이 좀 있더라. 영화에서 세영(엄지원)이 ‘머리 까진 아저씨’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김현석: <스카우트>는 전사모가 좋아할 영화 아닌가? <화려한 휴가>처럼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주인공 호창(임창정)이 전두환을 좋아하는 판에 일해공원에서 상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웃음)

최동훈: 난 호창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어서 좋았다. 특히 임창정의 연기는 정말 막강했다.

김현석: 원래 참 잘하는 배우인데, 정말 나랑 같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영화인들 사이에서 다소 과소평가받은 배우가 아닌가 싶다.

최동훈: 나도 동의한다. 보통 사람 연기하는 게 참 힘들다. 특히 호창이 소년 이종범과 캐치볼하는 장면이 좋더라. 좋은 배우는 시나리오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 해도 뉘앙스가 느껴지게 만들어준다. 난 언제나 시나리오를 잘 못 썼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걸 배우가 입을 열면 좋게 만들어질 때가 있다.

김현석/그런데 문어체를 임창정이 하면 어색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에게는 구체적인 대사를 지정해주는 것보다 이런 느낌이다, 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얘기해주면 최고의 장점이 나올 때가 있다.

최동훈: 특히 호창이 취조받고 있는 세영을 홀로 두고 떠나는 장면에서 울었다. 그때 이 영화가 멜로영화구나, 하고 직감했다. 처음에는 광주로 스카우트하러 가는 대소동극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김현석: 나 역시 계속 멜로영화라고 생각하고 찍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멜로영화 <기쁜 우리 젊은날>인데 <광식이 동생 광태> 때는 거의 전체가 그 영화에 대한 오마주였다.

최동훈: 나 역시 멜로영화가 진짜 하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 믿는다. (웃음) 난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도 좋지만 클라크 게이블, 캐리 그랜트가 등장했던 그 시대의 무게감있는 멜로영화가 좋다. 그런데 만들 때는 <라빠르망>이나 <러브레터> 같은 미스터리가 있는 방식으로 풀고 싶다. 그런 점에서 <스카우트>가 참 구조를 잘 짰다는 생각을 했다. 세영이 왜 호창을 떠나게 됐는지 하는 미스터리를 플래시백으로 처리한 부분도 있고, 그래서 더 관심있게 볼 수 있었다. <스카우트>는 크게 3개의 스토리라인이 있다.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는 라인, 그러다가 옛 애인을 만나는 멜로 라인, 그리고 당시의 광주라고 하는 또 어마어마한 시대적 배경의 라인이 있다.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진짜 섞이기 힘든 것들이다. 여간 능숙한 작가가 아니라면 엄두도 내기 힘들다.

김현석: 시작은 선동열 자서전에서 ‘1980년 난 광주일고 3학년이었다’라는 한 문장에서 출발했다. 스카우트라는 직업에 관심있었던 건 전혀 아니고 멜로 라인으로 엮은 것은 순전히 내 취향이다.

최동훈: 나라고 뭐 한국은행 터는 것에 관심있었겠나? (웃음) 훌륭한 재주라고 생각한다. A로 시작해서 B로 살짝 건너간 다음 C로 끝나는 묘미. 주변에 시나리오 쓰는 사람들이 한국 시나리오는 잘 안 읽는데 그중에 걸작들이 굉장히 많다. 난 요즘도 작업실에서 잘 안 풀릴 때 보는 게 송길한 선생의 <짝코> 시나리오다. 얼마나 기본기나 구조가 중요한지 말해준다. 시나리오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김현석: 나 역시 이번에는 구조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사랑하기 좋은 날>은 에피소드 좋은 거 20개 정도 써놓고는 짜맞춘 거다. 윌리엄 골드먼은 중요한 게 구조, 구조, 그리고 또 구조라고 했다는데 거의 편법이나 다름없다. 최근 그걸 더 절실하게 느낀다.

최동훈: 맞다. 나 역시 사람들이 계속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건 결국 구조라고 생각한다.

김현석: 그런데 사실 그게 잘 안 된다. 쓰다가 잘 안 되면 계속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구조가 좋은 건 오히려 당신이다. <타짜> 다시 보니까 놀라웠다.

최동훈: 무슨 소린가. 우리 아버지는 내가 만든 두 영화 영원히 이해 못하고 계시다. (웃음) 아,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내가 꼭 다른 영화에서 숏바이숏으로 써보고 싶은 장면이 있었다. 데드볼 플래시백인데 호창이 ‘그 인간이 누구지?’ 하고 생각하면서 이중으로 플래시백이 들어가는 건데, 아까 봤던 애의 기억이 들어가고, 더 먼 과거의 숏이 데드볼 맞고 싸우는 그런 숏으로 나온다. 그 다음 바로 호창이 멀리서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나타난다. 그 장면이 좋더라.

김현석: 나 역시 그런 과장된 장면이 좋다.

최동훈: 난 영화의 중요한 묘미 중 하나가 플래시백이라고 생각하는데 <스카우트>의 플래시백이 좋았다. 모두 3번 나오는데 다들 감성적인 느낌이 있다. 처음에는 촛불로 시작하고, 두 번째는 호창이 구토하는 걸 세영의 아버지가 등을 두들겨주면서 들어가고, 세 번째는 유니폼 얘기를 하면서 넘어간다. 각각 서로 다른 이유가 있는 건데 그게 또 이 영화가 멜로영화라는 걸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구조라 좋았다. 세영과 호창이 헤어진 이유도 너무 슬펐고. 그렇게 후반부로 가면서 엄지원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김현석: 스스로 멜로라고 생각하니까 의도하든 하지 않든 그렇게 된 것 같다.

최동훈: 이번에 결혼하면서 이사 간 아파트에 엄지원씨가 살고 있어 반가웠다. 그런데 바로 이사가버리더라. (웃음) <스카우트>에서 지원씨의 전라도 사투리 연기가 좋았다.

김현석: 내 고향이 광주인데, 완벽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신도 고향은 전주 아닌가?

최동훈: 전주와 광주는 거의 LA와 하와이의 차이다. (웃음)

김현석: 지원씨에게 굉장히 고마웠던 건 시나리오만 보면 세영이 잘 안 보이는데 그걸 생생하게 만들어줬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 남자감독들이 여자 캐릭터를 잘 못 다루는데 나 역시 그러니까 걱정이 컸다. 평면적인 느낌도 있고 비중도 크지 않아서 몇번 거절하기도 했다. 게다가 영화에서 선동열 스카우트하는 시퀀스에서는 거의 20분 정도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잘해줘서도 고맙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원씨가 늘 가지고 있던 비련의 여인, 남자의 로망 같은 그런 느낌에서 변화를 잘 준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전에 지원씨가 충무로 총각 남자감독들 중 괜찮은 남자로 순위를 매긴 적이 있는데 거기에 당신과 나 둘 다 5위 안에 넣어줬다.

최동훈: 실제로도 참 고운 눈을 가진 배우인 것 같다. (웃음) 그러고보니 여배우로는 김혜수씨가 당신과 내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타짜> 때 당신을 VIP시사회에 초대한 적 있는데, 영화 보고 바로 간다고 하기에 ‘혜수씨는 만났냐?’고 하니까 ‘꼭 안아줬다’고 했다. (웃음) 가끔 혜수씨가 안아주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 참 좋다.

김현석: 나도 마찬가지다. 혜수씨가 안아줄 때 뒷발 드는 거 아나? 나 안을 때는 몰랐는데 다른 사람 안을 때 보니 그렇더라. 나 역시 그럴 때 영화감독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웃음)

최동훈: 그러고보니 <타짜>의 조승우도 <YMCA 야구단>에 출연했다.

김현석: 아, 맞다. 승우가 내 영화에 출연한 적 있구나. 그걸 왜 자꾸 까먹지. 어떻게 디렉션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2회 찍었는데 말도 몇 마디 안 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비광’도 <타짜>처럼 화투다. (웃음)

최동훈: 승우는 별다른 디렉션을 안 줘도 잘하니까 그랬을 거다. 아무튼 또 궁금한 건 영화에 등장하는 학교가 고려대, 연세대가 분명한데 실제 이름을 왜 안 썼나 하는 점이다. 안암동, 신촌 정도로만 등장하고. 내 영화에 서울대, 이대 그대로 나온 건 보는 사람 입장에서 다 구라라는 걸 알기 때문인 건데.

김현석: 선동열이라는 실명은 써야 하고 또 그가 당시 고려대로 간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안 쓰는 거니까 이게 참 웃긴 구조다. 실제로 유니폼 디자인도 연세대, 고려대와 비슷하게 했는데 실제 물증으로 드러나는 컷은 없다. 보기에 따라 민감한 부분이 있기에 개인적으로 실제 학교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고리대나 연서대 같은 이름을 쓸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또 너무 이상하고.

최동훈: 90년대 만화 보면 삼송생명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는데 하긴 고리대나 연서대 같은 식으로 나왔다면 더 코미디였을 것 같다. 영화를 보면 구교대가 나오기 때문이기도 한 건가?

김현석: 그런 부분도 있다. 실제로 당시에 그런 일들이 자행됐지만 특정한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영화 속 사건의 많은 부분들은 취재를 통해 쓰여진 것들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선수를 점찍으면 일단 병원에 가둬두는 일이 많았고 깡패를 동원해서 감금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최동훈: 당신 연세대 출신인 것도 맞는 건가? 요즘 하도 학력위조 얘기가 많아서. (웃음)

김현석: 물론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도자료 프로필에 내가 중앙대 대학원 졸업이라고 나왔는데 그런 일들이 있으면서 수료로 바꿨다. 졸업논문은 안 썼으니까.

최동훈: 그래도 역시 실제 야구선수들의 실명이 등장할 때의 쾌감이 있다. 선동열은 물론 이종범, 이순철까지.

김현석: 그 가운데 포수는 봉구다. 이상무 만화에서 독고탁의 친구였던. 그러고보면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최동훈: 하긴 그러고보면 사람은 참 잘 안 변하는 것 같다. 내가 맨 처음 쓴 습작도 대학생 5명이 은행 터는 이야기였다. (웃음) 그런 게 어떻게 보면 평생 가는 것 같다.

김현석: 나 역시 평소에는 선동열 자서전 보고 그런다.

최동훈: 나는 신창원 잡으러 다녔던 경찰이 쓴 자서전 읽고 있다.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변화는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최고의 스승 아닌가.

김현석: 맞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