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 생각해봐도 유치하지만, 예전에 ‘언젠가 한번 꼭 해봐야지’라고 다짐했던 일 하나는 눈이 부시도록 화사한 남국의 해안 백사장에 놓인 긴 의자에 누워 한가로이 책을 읽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와,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호젓하게 즐기는 것. 새소리가 들리는 산사나 제주도의 푸른 밤이 아니라는 건 분명 할리우드영화 어딘가에서 영향을 받은 이식된 이미지겠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꽤 간절하게 그리워했던 꿈이었다. 후일 직접 경험하고 나서, 별다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어딘가의 풍경으로만 존재하고 싶은 욕망은 단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기를 원하고, 전혀 낯선 곳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낙원이 아니라, 단지 도피처로 전락하기 일쑤지만. 대니 보일의 <비치>는 그런 여행자들의 백일몽을 그린 영화였다. 그곳에 나오는 게스트 하우스의 풍경을 만난 곳은 <툼레이더>의 현장이었던 캄보디아에서였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암 립이라는 작은 관광도시. 유흥가로 접어들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가득한 클럽도 있고, 허름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걸친 배낭여행족들이 진을 친 게스트 하우스와 바도 있다. 문짝도 없는 바에 들어가 수많은 벌레와 도마뱀과 동석하여 맥주를 마시고 있으려니, <비치>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그 멋진 바다의 풍경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로버트 칼라일의 광란이. 천국에 오래 있으면, 그렇게 되려나?
<툼레이더>의 스탭 중 한 사람은, 앙코르와트에 여행을 왔다가 그곳이 좋아 몇년째 머무르고 있는 영국인이었다. 영화와는 무관한 사람이었지만, 그곳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일들을 맡고 있었다. 그곳 게스트 하우스에는 그렇게 몇년째 묵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했다. 그런 말들은 많이 들었다. 어디론가 여행을 다니다가, 그곳이 마음에 들면 그냥 주저앉아 몇년씩을 머무르는 사람들. 아예 그곳의 주민이 되는 경우도 있고, 고국으로 돌아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제는 그런 피안의 환상이, 가슴을 흔들지는 못할 나이가 됐다. 떠나가도, 언젠가는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간다면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그건 소수에게만 허락된 행복한 가시밭길이다. 여전히 소시민으로, 미래에도 변함없이 살아갈 자의 일상이란 대부분 예측가능하고 반복되는 날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6, 7년을 백수로 살아가면서, 그런 미래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결과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사회로의 귀환이었다. 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생각한다. 상처를 주지 않고, 받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그러나 이탈이란, 때로 나른한 행복으로 다가온다. 2주간 휴가를 떠난 적이 있었다. 서울과의 연락을 끊고, 사회적인 관계를 단절시킨 채 보낸 2주. 일체의 외적인 자극없이, 오로지 나 자신의 욕구와 느낌에만 따라 움직였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걷고 싶을 때 걷고, 가끔 자판을 두드리고 싶을 때 두드리고. 그렇게 ‘아주 짧은’ 2주를 보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무대에 나서려 하는 건 아닌지. 별다른 능력도 없이 생존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바쁘게 살아가야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가끔 도로에서 벗어나 너른 들판을 바라보고 싶다고. 추월하는 차들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도로 저편을 바라보며.
그래서 굳혔다. 일단은 벗어나 보자고. 그냥 한순간의 실험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고, 단순한 낭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한번 해보자고. 어차피 먹고살려면 일은 해야 하는 것이고, 다만 나 스스로의 동인(動因)이 무엇인지를 한번 지켜보자고. 어떤 목적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싶어서. 누군가는 우려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좋겠다고도 하지만 나는 그냥 두려울 뿐이다. 인간이 동물을 두려워하면서 도구를 만들고, 동굴 안에 은신처를 만들었듯이, 나 역시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며 나 자신의 생존 매뉴얼을 만들어나갈 생각이다. 한나절의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기는 하지만.
김봉석 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