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이 묵직하다. 이게 다 돈이 많아 묵직한 것이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현금은 탈탈 털어도 별로 보이지 않고 쓸데없는 카드들만 그득이다. 그러고보니 요즘 광고하는 웬만한 신용카드는 지갑에 한장씩 다 들어 있는 것 같다. 연회비 없으니 받고 가위로 잘라버리라며 신청서를 떠맡기는 지인들의 청탁(?)에 못 이겨 만들었다가 계속 지니고 있는 카드들이 대부분이고 주로 쓰는 건 한두장쯤 될까.
플라스틱 시대에 신용카드 좀 가지고 있는 게 무슨 잘못은 아니지만 안 그래도 큰 씀씀이에 지니고 있으면 지름신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 카드들 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TV를 돌려보니 요즘 신용카드 광고들이 유독 많다.
오, 격세지감이라. 원래 전통적으로 금융권 광고는 좀 무게도 잡고, 신뢰감있게 세련되면서도 진중하게 가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라 생각해왔는데 적어도 신용카드에 있어서는 그런 불문율이 깨진 지 오래인 듯하다. 요즘의 카드 CF는 도대체가 한없이 가벼워 깃털처럼 날아갈 것 같더라 이 말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현대카드였을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스타일의 세련되면서도 유머감각 넘치는 일련의 CF들로 현대카드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이후 카드 CF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나오는 카드 CF들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현대카드가 너무 진중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힙합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리를 활기차게 춤추며 걷는 비의 T셔츠 안에 화려한 그래픽들이 움직인다. 표절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이 CF에서 비는 내 가슴이 시키는 곳, 이제는 하고 말겠다는군. 화려한 손동작으로 K카드를 꺼내 들며 웃는 비의 표정은 젊고 자신감에 넘친다. 하긴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카드 좀 긁는 게 뭐 대수겠어. 합병을 통해 새로이 거대 카드회사로 탄생한 S카드의 런칭 CF는 아예 대놓고 패러디와 키치를 활용하고 있다. 성우 이철용과 영화 예고편을 차용한 남녀의 연애로 합병을 알리더니, 이제는 로맨스영화의 각종 장면들을 패러디한 광고로 한층 공격적인 물량공세에 나섰다. 아, 그 아름다운 영화 속 장면들의 주옥같은 대사가 고작 카드 혜택으로 바뀌다니 어쩐지 조금 서글프기도 하네. 그리고 김태희를 내세운 B카드사는 급기야 큰머리 인형까지 등장시킨다. 성우는 애니메이션 케로로(<개구리 중사 케로로: 최종병기 키루루>)에서 내레이션을 해주시던 바로 그분이잖아! 가위바위보에서 승리할 정도의 놀라운 똑똑함을 지닌 김태희의 카드생활이란다. 뭐, 아끼고 현명하게 쓰자는 얘기를 하는 것 같긴 한데 이게 너무 장난스러워 김태희가 정말 똑똑한 건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각 카드사가 내세우는 CF의 메시지들은 조금씩 다 다르지만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젊고 가볍고 또 가볍다는 것이다. 정장을 입은 남녀가 나와 고급 레스토랑이나 백화점에서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내미는 식의 CF는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신용카드는 돈있는 사람들의 무언가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각종 포인트와 할인 혜택을 누리며 장난스럽게 쉽게 내밀 수 있는 것이 신용카드. 이 CF들이 지향하는 바는 그렇다. 소비를 두려워하지 말라. 가볍게 쓰라. 쓰는 건 당신을 더 멋지게 만든다. 카드소비는 연애와도 같은, 놀이와도 같은 즐거움이다.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카드 CF들은 당연한 진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비의 주체는 점점 더 젊어지고 있으며, 소비는 점점 더 쉬워지고 있다. 무게잡고 카드 긁던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한없이 가벼운 카드 CF들을 보며 두려워지는 것은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젊은 사람들이 과연 그 원하는 만큼의 즐거운 소비를 감당할 만한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 써라 즐겨라 누려라, 그리고 그 뒤엔? 카드 고지서는 꽤나 무거울지도 모른다.
즐거운 카드 CF들 뒤에 쉽고 가벼운 대출광고들이 이어지는 모습에 조금 아찔해지기도 하는 것은 엊그제 <88만원 세대>를 읽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들 소비는 알아서 계획적으로 영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