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태왕사신기>와 SBS <로비스트>의 동시간대 방송을 두고 ‘판타지 사극 블록버스터’ 대 ‘리얼 현대극 블록버스터’의 대결로 사전에 압축한 것은 적절치 못했다. 일단 후자가 판타지극보다 더 뜬구름을 잡고 있을뿐더러 중반부에 이르도록 동체급의 펀치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90%를 영상의 완성도에 집중한 듯한 <로비스트>는 그림 만들기에 대한 애정과 캐스팅 파워를 종합한 비장의 탱고신(9회)에서마저 그만 허탈한 한숨을 짓게 만들었다. 주인공인 장진영과 송일국의 매력과 학습 능력에 관해서만은 탄성을 유도하기에 족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장면의 전후 사정은 ‘너무합니다’라고 노래 한 소절을 길게 꺾어 부르고 싶을 만큼 너무했다.
기다리기 며칠로 철옹성 같은 무기로비스트 ‘제임스 리’(허준호)와의 대면에 성공한 ‘마리아’(장진영)는 “로비스트가 되고 싶어요”라는 한마디로 수습 과정에 돌입, 이날 빨간 드레스를 입고 무기거래 계약의 키맨인 압둘라 왕자가 참석하는 파티에 동참한 터였다. 그곳에서 때마침 마피아 두목의 부인 ‘채마담’(김미숙)의 ‘포터’ 역을 참 오래도록 수행 중인 ‘해리’(송일국)와 마주친 마리아는 즉흥 탱고 공연을 멋지게 펼치는 초인적인 재능을 발휘, 왕자의 시선을 붙잡는 데 성공한다. 그 다음 바로 계약 성사였으면 좋았을 텐데 계약의 대가로 몸을 요구하는 왕자의 제안을 받게 된 마리아는 입술을 맞댈 찰나 방에서 뛰쳐나오고 만다. 그 경험으로 인한 마리아의 번민과 상처는 모르겠다. 드라마가 다시 급발진했기 때문이다. 배짱과 외모에 마음과 몸이 찢어지고 짓밟혀도 살아남는 근성도 갖춰야 한다는 제임스 리의 무시무시한 로비스트 자격론을 들은 뒤 금세 심신을 재정비한 마리아의 모습으로 직행한다. 그리고는 얼굴에 검댕을 묻혀가며 총을 걸레질하는 게 진정한 선수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친절하게 부연 설명한다.
무기로비스트의 은밀 살벌한 세계에 희생된 언니를 둔 마리아나 여동생을 위해 성공을 꿈꾸는 해리는 사랑이란 늘 어릴 적의 인연에서 출발하고, 인생의 굴곡과 성공의 동기는 가족에서 비롯한다는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전제를 답습하며 관계자 외 출입금지 영역 같은 전문직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 그런데 그나마 새로움의 대상인 프로페셔널의 내부조차 영어 대사와 화려한 복식만 난무할 뿐 현실의 이면에 대한 구체성도, 호기심도 주지 않는 초보적인 가이드로 하품을 자아낸다. 주인공들의 행동에 설득력을 싣는 과정은 알아서 건너뛰고, 주변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도에는 수다가 많아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고 싶도록 만드는 전개의 이상한 완급조절도 불가사의한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는 무기로비스트의 존재 가치와 의미에 관한 성찰없이 출발한 기초 부실의 흔적마저 드러내고 있다. 마리아가 뉴욕의 야경을 바라보며 무기로비스트의 길에 희망 찬 미소를 짓는 할리우드식 성공담의 전주곡을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미국인의 경험담과 결부짓는 것은 ‘어이, 잠깐만’의 방어기제를 유발한다. 그 미국인 가라사대, 전쟁은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것이란다. 용기, 애국심, 희생, 가족의 눈물 등이 총망라돼 있는 것이란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말에 감동을 받는다. 맙소사, 이 미화된 전쟁론을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이 드라마를 보면 장진영과 송일국에게 느끼한 왕자의 추파를 당하지 말고, 또 누님의 드레스 지퍼 올리는 짓 그만하고 프라다를 입은 악마를 찾아가든지, 인생의 운을 걸 다른 직업을 구하라고 감히 권하고 싶어진다. <로비스트>는 황당하고, 소름 끼치며 공포스러운 전쟁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