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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웰메이드, <발굴된 과거: 일제시기 극영화 모음>
ibuti 2007-10-26

한국영상자료원이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 수집한 1930, 40년대 극영화들은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역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그간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된 여러 작품 중 네편이 <발굴된 과거>라는 이름의 DVD 박스 세트로 선보인다. 네 영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말기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당시는 1940년 1월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영화령을 공포하고 조선영화인협회가 설립된 데 이어 1942년 9월에 조선영화주식회사가 발족할 때다. 영화인들의 생존권이 박탈당하고 기존 영화사의 재산이 모조리 빼앗긴 ‘신체제’하에서 조선영화는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한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1930년 전후 조선영화의 민족저항주의나 ‘카프’가 강령으로 내건 ‘무기로서의 예술’ 같은 에너지라곤 찾을 길이 없는 네편 영화를 대하는 마음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최인규의 1941년작 <집 없는 천사>는 거리 부랑아들의 생생한 삶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남자의 가상한 노력을 그리면서 한국 리얼리즘영화의 계보를 잇는다. 극중극 형식을 취한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은 시스템이 부재하던 환경에서 벗어나 스튜디오를 갖춘 영화사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의 상황을 반영한 작품이다. 당시 최고의 스타인 문예봉이 주연을 맡은 <지원병>(‘카프’의 발기인이었던 안석영이 1941년에 발표한 어용영화다)과 <조선해협>(박기채, 1943)은 지원병으로 나선 남자의 이기심과 전근대적인 상황 사이로 가혹한 러브스토리를 삽입한 멜로드라마다. 네 영화가 제작된 게 1940년대여서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문예물 정도를 예상했다면, 현대식 술집, 네온이 반짝이는 종로거리, 종종 흘러나오는 서양의 대중음악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올지 모르며, 인상적인 영상과 매끈한 편집 그리고 자연스러운 연기, 탄탄한 구성 등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 정경의 기록과 영화적 아름다움이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마는 건, 위에서 언급한 바 곳곳에 박혀 있는 선전영화의 기운 때문이다. 아이들이 휘날리는 일장기 앞에서 ‘황국신민의 맹세’를 외치고(<집 없는 천사>), 영화사의 대표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의 책임’을 회사의 설립 이유로 들고 있으며(<반도의 봄>), 노골적인 선전영화인 <지원병>과 <조선해협>에서 주인공은 황국신민으로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거리낌없이 주장한다. <발굴된 과거>에 수록된 네편 영화는 수용과 해석에 있어 현대를 사는 한국인에게 쉽게 말하기 힘든 화두들을 꺼낸다. 이들 영화가 단절되었던 시대 안에서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 한국영화라는 큰 맥락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일본어 대사만 나오고 생산 주체도 조선인이 아닌 <조선해협> 같은 1943년 이후 영화를 과연 조선영화로 인정해야 하는지, 근대성의 추구와 영화의 제작환경이란 점에서 현재 상황과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는지 등등. 결국엔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시선에 다름 아닐 터 당신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디지털 복원작업의 현실적 한계를 감안했을 때 DVD 영상이 기대 이상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기존에 선보인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자유만세>의 DVD와 비교해 그러하고, 얼마 전 미국에서 출시된 고전 중국영화들의 DVD들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필름의 보관상태가 좋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부록으로는 네편 영화에 모두 출연한 1930, 40년대 유명배우 김일해에 관한 다큐멘터리(51분), <집 없는 천사>에 아역배우로 출연한 송환창 인터뷰(27분), 영화평론가 김종원의 작품해설(29분), 사진 자료 등을 제공한다. 그리고 두권의 별책부록- <집 없는 천사>의 일본어 원본 시나리오, 한국영화사 연구가 이순진의 충실한 글이 수록된 해설책자- 이 박스 세트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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