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83살이었고, 남자는 84살이었다. 그들은 지난 9월24일 북동 프랑스 오브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남자는 여자 곁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30년 가까이 여자의 몸을 갉아먹고 있던 진행성 질환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 앞의 생이 길지는 않았겠으나,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60년 동안 서로 사랑했고, 58년간 부부였다. 여자의 이름은 도린이었고 남자의 이름은 앙드레였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도린이었으나,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앙드레가 아니었다. 남자가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을 때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게르하르트였다. 여자는 60년 동안 남자를 그 이름으로, 정확히는 그 독일어 이름을 프랑스어 식으로 다듬어 제라르라 불렀다. 남자의 아버지는 호르스트라는 성을 지닌 유대인 목재상이었고 어머니는 가톨릭이었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나치 정권이 두 나라의 합방을 선언하자, 남자의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이듬해 스위스로 여행간 남자에게 부모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오지 말라고 일렀다. 16살 소년 게르하르트 호르스트는 로잔에 정착했다. 그리고 로잔대학에서 화공학을 공부했다. 고향을 떠나면서 남자는 무국적자가 되었다. 그 무국적 상태는, 1954년 프랑스 총리 맹데스-프랑스(그도 유대계였다)의 호의로 남자가 프랑스 국적을 얻을 때까지 이어졌다.
남자에게 처음 호감을 보인 프랑스인은 맹데스-프랑스가 아니라 사르트르였다. 게르하르트 호르스트는 1946년 로잔으로 강연 온 사르트르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반했고, 호르스트는 사르트르와의 이 만남을 통해 제 기질이 화공학보다는 넓은 의미의 철학쪽에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 그는 제도교육 바깥에서 자신을 철학자로 단련시켰다. 사르트르와의 인연으로 호르스트는 삶의 둥지를 파리로 옮겼고, 1960~70년대에 <현대>의 편집에 간여했다.
남자는 철학자이기에 앞서 기자였다. 그의 기자 이력은 <파리-프레스>에서 시작해 <렉스프레스>와 <르누벨옵세르바퇴르>로 이어졌다. 그는 <르누벨옵세르바퇴르>의 창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병든 아내를 돌보기 위해 1983년 때이른 은퇴를 하기까지 그는 이 시사주간지를 이끌었다. 기자로서 그가 다룬 영역은 주로 경제였다. 그것은 그의 철학이 사회·정치적 지평으로 늘 열려 있던 것과도 무관치 않았다.
기자로서, 남자의 이름은 게르하르트 호르스트가 아니었다. 종전 직후 독일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감정은 최악이었다. 첫 직장인 <파리-프레스>의 편집장은 독일 이름으로 기명기사를 쓸 수는 없다는 점을 오스트리아 남자에게 납득시켰다. 남자는 흔해터진 프랑스 이름 미셸에다가 보스케라는 성을 붙여 제 필명으로 삼았다. 보스케는 남자의 원래 성 호르스트(덤불)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다. 이렇게 해서, 한 세대 이상 프랑스 좌파 경제저널리즘의 한 분파를 지휘한 미셸 보스케 기자가 태어났다.
철학자로서, 남자의 이름은 미셸 보스케도 아니었다. 독일인에 대한 프랑스어 멸칭(蔑稱) ‘보슈’를 대뜸 연상시키는 보스케는 귀화를 바라는 사람에게 알맞은 성이 아니었다. 세 번째 이름이 필요했다. 그는 이번에도, 흔해터진 프랑스 이름 앙드레에다 고르라는 성을 붙여 프랑스인이 되었다. 고르는 남자가 아버지의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던 쌍안경의 산지(産地)였다.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기슭의 이 작은 도시(이탈리아어로는 ‘고리차’)는 본디 슬로베니아인들의 땅이었고, 오래도록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 경계의 땅은 모두의 땅이면서 누구의 땅도 아니었다. 남자는 이 도시의 경계성이 제 망명자 정체성과 닮았다고 여겼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후반의 정치생태론과 문화사회론을 풀무질한 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태어났다.
사르트르의 영향 아래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버무리며 출발한 고르의 사회철학은 선배의 것보다 한결 덜 관념적이었고 그러면서도 더 전복적이었다. 선배가 살아 있을 때, 고르는 이미 <생태론과 정치>를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적색에서 녹색으로 이동시켰다. 선배가 죽은 해에 출간한 <아듀 프롤레타리아>에서, 그는 노동의 역사형성력과 노동계급의 역사적 특권을 부인하며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다. 그 뒤 내놓은 <노동의 변신>과 <눈앞의 비참, 숨어 있는 풍요>에서, 그는 일하지 않는 사람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구상했다. 그러나 미셸 또는 앙드레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저널리즘도 철학도 아니었다. 그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자신을 제라르라 불렀던 여자, 도린이었다. 남자가 영국인 아가씨 도린을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10월이었다. 남자의 회고에 따르면 눈 내리는 밤이었고, 그는 춤추러 가자고 여자를 꾀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공기를 호흡하듯 상대를 호흡했다. 여자는 제 남자 주변의 유명인들을 자연스럽게 대할 줄 아는 기품과 지혜가 있었다. 사르트르도 맹데스-프랑스도 자기들 앞에서 스스럼없었던 도린을 좋아했다.
아내를 수신인으로 삼아 지난해 출간한 <D.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남자는 “상대가 자기보다 먼저 죽을까 봐 우리는 늘 두려워했지요”라고 썼다. 그 두려움을 60년 넘게 견디기가 두 사람 다에게 힘겨웠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