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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열두명의 동생들
강병진 2007-10-19

무려 12명이다. 삼촌들의 아들·딸과 고모들의 아들·딸을 합해 나에게는 총 12명의 사촌동생들이 있다. 어느 집이나 비슷하겠지만 금실이 좋으셨던 건지 집안의 대를 잇는 걸 지상과제로 삼으셨던 건지 조부모께서는 8남매를 두셨고 그래서 그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면 그들은 언제나 내 담당이었다. 어른들이 한쪽에서 식사를 할 때면 나는 항상 그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대장 노릇을 했다. 문을 지키고 서서는 “너, 뛰지 마”, “야, 가만히 앉아 있어”, “이씨, 너는 왜 동생을 울리고 그래?” 등등 숱한 경고와 지시와 엄포로 아이들을 다그쳤다. 12명 가운데 8명이 여동생인 터라 나도 모르게 마초 오빠의 성향을 보였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때는 그렇게나 많은 아이들을 웃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열두명의 웬수들’과 같은 존재였던 건 아니다. 바로 밑의 동생인 하라와 나의 나이 차이는 10살이다. 당연히 나는 그들의 탄생과 성장을 모조리 목도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부모들이 자식을 키우며 느꼈을 기쁨과 아쉬움, 놀라움 등을 비스무레하게 체험했다. 어렸을 때는 만나기만 하면 팔로 내 목을 감던 하님이가 어느 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피자를 사준다는 오빠의 말조차 거부하려 들 때는 꽤나 놀랐더랬다. 심지어 그 아이가 1년 전, 좋아하는 오빠가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상처받지 말고 차라리 상처주는 여자가 돼라”는 내 경험과는 전혀 무관한 충고를 늘어놓기도 했다. 하님이의 동생 하곰이가 어느덧 나보다 큰 키의 꽃미남이 되었을 때는 인체의 신비란 제목 정도의 생물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고, 아기 때부터 말괄량이였던 정민이가 동인지 오타쿠에 코스프레 마니아가 된 걸 보며 난감해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렸을 때는 마냥 밝던 하라가 10대의 막바지에서 현실의 비루함을 느끼며 시니컬한 모습을 보일 때는 안타깝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예전에도 어리광이 많던 하건이가 11살인 지금도 ‘형!’ 하고 부르며 달려와 안기는 걸 볼 때도 있지만.

이번 추석에 다시 그들을 만났다. 언제부턴가 명절 때만 보고 안부를 묻는 처지가 됐지만, 아직도 아이들은 나를 형으로, 오빠로 대하며 수다를 늘어놓는다. 하님이는 작곡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고, 하라와 하렴이는 아버지의 근무처를 따라 칠레로 이주할 계획을 갖고 있고, 사촌형제들 중에 막내인 하건이는 어떻게 하면 휴대폰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단다. 하지만 여느 명절과 다름없는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이들이 과연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이렇게 웃으며 조잘댈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나의 삼촌과 고모들이 저마다 생업에 바쁘고 생각이 달라 조금씩 멀어져 있는 것처럼, 이들과 나의 관계 또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또 다른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불과 5년만 지나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 가끔씩 잠이 안 온다며 새벽에 문자를 넣는 하님이나, 가끔씩 어떤 영화가 재밌냐고 묻는 하라나, 도토리를 달라며 미니홈피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효민이나, 그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고 나 역시 지금처럼 형으로서, 오빠로서 그들을 챙겨야 한다는 의식을 잊고 살 것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오히려 그들과 멀어지는 게 당연한 것도 같다. 각자가 생업에 바쁠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것만큼 좋은 게 없는 세상 아닌가. 이제 서서히 혹독한 현실에 발을 디딜 그들에게 아무런 힘이 못 될 바에야, 잔소리를 다무는 게 좋은 형, 오빠로서 남는 길일 것이다. 할아버지 제사 때 못 와도 좋고, 명절 때 사과박스와 함께 찾아오지 않아도 좋고, 하다못해 생일날 미니홈피에 축하멘트를 남기지 않아도 상관없다. 부디, 제발, 꼭 이 나라에서 어떻게든 벌어먹고 버텨서 살아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