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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의 CF] 아비 좀 그만 팔아먹어라

아버지라는 방패막이 뒤에 숨어 있는 광고들

영화 장르가 다양하게 나뉘는 것처럼 CF도 마찬가지다. 굳이 장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CF의 톤(Tone)을 어떻게 갈 것인가에 따라 감동 드라마냐 코미디냐 하는 것들이 결정되고, 이건 보통 광고하는 제품의 성격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과자나 음료, 패스트푸드의 경우 가볍고 재미있는 톤이 많고, 신뢰감이 중요한 금융권이나 기업 PR은 진중하거나 감동을 주는 것들이 많으며, 같은 차라도 중형 이상의 세단이면 세련되고 진지하게, 경차나 스포츠카는 기발하고 발랄한 CF들이 많다. 뭐, 이게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가 그렇듯이 정해진 CF의 틀을 벗어날 때도 기발한 광고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쨌든 15초 혹은 30초라는 짧은 CF에서 감동 드라마를 만들어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라 진짜 감동을 주는 CF는 잘해야 1년에 두어편, 가뭄에 콩나듯 만나게 마련이지만 기업 PR이나 보험사를 중심으로 감동 CF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은 계속되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감동 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해 보통 이런 류의 CF들은 불치병으로 헤어진 부부처럼 듣기만 해도 눈물이 솟는 소재라든가, 역경을 헤친 스포츠 선수라든가, 보기만 해도 자신의 경험과 겹쳐져 머릿속에 촤르르륵 풍경이 지나가는 소재들을 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중의 으뜸 단골 소재는 바로 ‘아버지’다.

헌신적인 사랑의 어머니상이 모던하고 똑똑한 어머니상으로 대체되는 동시에 너무 많이 우려먹어 식상해지기 시작하면서- 실은 그것이 절대 식상할 성격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대안으로 아버지들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언제부턴가 아마 IMF 이후부터 권위의 상징이라기보다는 회사에 치이고 가족들 부양에 치이는 안쓰러운 존재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CF에서는 이런 힘들고 안타까운 아버지들을 이용해 감동을 주려는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CF들에서 아버지 혹은 남편은 늘 밤늦게까지 일하고, 일에 지쳐 어깨가 처져 있고, 덕분에 가정에 소홀해 아이들과 얼굴 마주할 시간도 별로 없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실제로도 그렇다. 아버지들뿐만 아니라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던가. 그런 아버지들을 잔잔한 배경음악을 깔아 보여주면서 아버지 덕분에 가정이, 회사가,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격려한다. 조금은 감동적이다. 그래, 일하느라 저렇게 안쓰러운데 격려해줘야지. 그러나 계속 보다 보면 조금 이상한 생각도 든다. 실제로 저런 아버지들을 진짜 위해주는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 계속 열심히 하라는 독려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지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해주고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가, 회사가 배려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삐딱하게 생각해보면 이거 매일같이 야근시키고, 경쟁을 강요하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동정을 엎은 아버지의 감동’ 뒤에 숨는 셈이다.

최근에 이런 아버지를 방패 삼는 극단의 CF가 하나 나왔는데 ‘10억을 받았습니다’란 광고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전력이 있는 P생명이다. 죽어서도 아이들 시집장가보내고, 유학공부시키는 아버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P생명 아버지란다. 아, 안 그래도 살아서 가장 노릇하느라 고생했는데 이젠 세상을 뜨고서도 노력봉사를 해야 한단 얘기인데 그 CF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우리 아버지들이 불쌍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이것도 감동이라면 감동? 아버지들의 가치를 단순히 부양과 돈으로만 치환시키고 있으면서 감동적으로 보이려 어찌나 노력을 하는지. 근데 그게 너무 직설적이고 얄팍해서 속셈이 다 드러나고 만다. 뭐, 솔직히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보험의 속성을 그대로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게 바로 ‘돈=돌봄’으로 만들어버리다니요. 감동은커녕 보면 기분이 나빠집디다. 생명보험 하나 들어놓지 않으면 아버지 자격 없는 것같이 얘기하는데 이 정도까지 가버리면 정말 비겁하지 않나요.

‘일하고 돈 버느라 힘든 아버지’ 뒤에 숨어서 아버지 등 떠밀며 기업을 파는 것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 이제 그만 ‘아버지들을 쉬게 하자, 놀게 하자’라는 CF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