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 장르로 편곡된 ‘영웅 판타지 칸타빌레’가 안방극장의 사극 메뉴를 감미롭게 물들이고 있다.
현재 MBC <태왕사신기>, MBC <이산> 등 제작진과 캐스팅의 솔깃한 크레딧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배부른 사극의 풍년기를 장식하고 있는 주자들은 광개토대왕의 빛나는 정복사나 정조대왕의 개혁적인 리더십 같은 교과서식 밑줄긋기보다 일단은 영웅의 연인화(化)로 더 매혹의 광채를 반짝이고 있다.
<태왕사신기>의 배용준과 <이산>의 이서진은 도포자락으로 왕자 복근을 가리고 반갈래로 묶거나 단정하게 상투를 틀어올려 시점이 과거임을 증거하고 있지만, 그것만 털어내면 ‘타임머신’의 격차와 역사적인 실재성을 뛰어넘는다. 무엇보다 발성은 우렁차고 볼 일이라는 사극 남자주인공의 선 굵은 전형도 깼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젖은 눈빛으로 권위의 마초형 영웅이 고린내 나는 골동품임을 확인 사살한다. 태자, 혹은 세손 상태로 영웅의 병아리 시절을 관통 중인 이들은 왕의 자리를 노리는 정적의 위협에 노출돼 있는 가련한 생명체로서 궁을 벗어나 시전에서 서민 동무들과 어울리고, ‘나, 왕 안 할래요’도 외치며 계급성을 뛰어넘는 보통 사람의 휴머니즘도 장착하고 있다. 누구에게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의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음에도 이들의 곁에는 어린 시절부터 쭉 자유롭고 여린 영혼을 보듬어주는 연인이 존재해 <소나기> <가을동화> <겨울연가> 등의 첫사랑 신화도 재생산하고 있다.
특히 드라마 사상 가장 큰 프로젝트로 재앙이냐, 축복이냐의 엇갈린 전망에 휘말렸다가 극 초반 제작비를 납득시키는 수준급 영상테크닉의 세례로 전자의 우려를 불식한 <태왕사신기>는 배용준을 통해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군주의 체온과 서정성을 전달하는 대목에서 ‘오우, 판타스틱!’이라는 앙드레 김 선생의 탄성을 자아낼 만하다. 사전제작의 치밀한 완성도를 기대한 이들에게 섭섭한 빈틈도 노출 중이지만 적어도 이 대작의 중요 인물인 배용준에 관한 기대치의 잔만큼은 찰랑찰랑 채우고 있다.
배용준은 단점은 감추고 강점을 극대화하는 컨트롤의 연기 아래 풍부하지 않은 표정 등을 강제하지 않은 단호함이나 ‘쿨’함, 비겁하지 않은 솔직함과 순수 등으로 치환하며 ‘욘사마다움’을 강화한다. 궁 안에 같이 웃어줄 사람이 없다거나 늘 내 곁에 있으라고 고독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이 아름다운 남자에게 ‘그가 아니면 나도 죽는다’는 절절한 호소를 내뱉는 것은 극중 ‘기하’(문소리)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태왕사신기>는 캐스팅의 호소력을 잘 파악한 연인 같은 영웅상을 통해 지상파 드라마의 절대적인 소비계층으로 자리잡고 있는 30, 40대 여성층의 모성과 영원한 소녀성을 두루 방망이질치는 데는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꼭 광개토대왕이나 정조가 아니어도 괜찮을 요즘 사극 속 영웅의 부드러운 허구성이 역사의식의 각성 보다 얼얼한 환각과 추앙을 자아내는 데 그치고 있다고 입을 삐죽 내밀 수도 있다. 그러나 드라마를 향한 시청자의 마음의 열쇠는 언제나 이성 혹은 인간에 대한 불멸의 로망을 자극할 때 빠르게 풀린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