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 안 받고 몰래 찍은 뒤 삼십육계 줄행랑치면 도둑촬영. 귀한 배우 스케줄 맞추느라 허겁지겁 오케이 부르면 날림촬영. 그렇다면 ‘조각보’ 촬영은 뭘까. 도대체 ‘조각보’가 무엇이기에,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한국영화를 망치는 원흉이라고까지 지목됐을까. 1970년 11월3일에 열렸던 한국영화인협회 제7차 임시이사회. 긴급소집한 영화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위장합작영화를 충무로에서 몰아내야 한다면서, “한·홍 합작영화치고 위장합작 아닌 영화는 한편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당시 극장 상영 중이던 <아빠는 플레이보이>(명보극장 개봉, 관객 수 2만3969명) 등을 지목하며, 몰지각한 영화 제작자들이 ‘야바우적 방법론’을 동원해 홍콩제 영화를 한·홍 합작영화로 둔갑시켰다고 비판했다. 이른바 ‘조각보 촬영’은 ‘야바우적 방법론’의 최신 기술. <아빠는 플레이보이>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2대 검왕>처럼 영화사에서 한국 배우(이자영)의 성을 뗀 뒤 ‘자영’이라는 중국 배우가 출연한다고 선전하는 케이스는 양심있는 축에 속했다.
자, 그럼 ‘조각보 촬영’의 놀라운 마술을 보시라. 먼저 홍콩의 쇼브러더스 등에서 2∼3년 전 개봉했던 권격영화 히트작을 하나 점찍는다. 두 번째는 “스토리를 건들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시나리오를 개작”한다. 그러고 나서 “합작영화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의 국내 배우를 출연시켜” 수정장면을 촬영한다. 마지막으로는 이를 믹스, 봉합한다. 조각보 촬영은 그러니까 “홍콩 완제품 영화에다 국내 배우의 얼굴을 뜯어 맞추는” 짜깁기 기술이 주가 된 기형의 몽타주 제작법이었다. “공중을 날아다니고 땅재주를 넘고 정신없이 칼싸움이 벌어지는 원경은 그대로 두었지만, 클로즈업된 주인공의 얼굴은 박노식의 그것이었다”. 김수용 감독은 <나의 사랑 시네마>에서 “심지어 어떤 것(영화)들은 자막에 한국 감독 이름을 끼워넣는 수법”으로 공동연출작으로 만들기도 했다면서 “사이비 합작영화가 (1970년대 초) 1년에 스무편이나 제작됐다”고 썼다. “검법도 익히지 않은 수법으로 무작정 칼을 휘둘러대는” 이 ‘허풍선이 검객류’ 영화들은 관객이 쏟아내는 야유의 휘파람에도 1980년대 초까지 줄기차게 상영됐다.
멀쩡한 세상이었으면 흉물이 봇물 터지듯 나왔을 리 없다. <영화잡지>(1971년 1월호)에서 “위장합작영화에 속지 맙시다”라고 캠페인을 할 정도로 1960년대 말부터 ‘짝퉁’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먼저 무데뽀 ‘영화법’. 당시엔 연간 일정 편수 이상을 제작해야 영화사 간판을 유지했다. 홍콩의 쇼브러더스는 넉넉한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어서 해외 로케이션이라고 해도 외려 한국에서 촬영하는 것보다 제작비가 절감됐다. 게다가 국내에선 생필름을 구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생필름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해외로 나가야 했다. 폐기 처분할 현상필름을 들고 나간 뒤 깡통에 생필름을 담아오는 식이었다. 1970년 11월15일에 발행된 <주간한국>은 “일단 외화로 분류되면 필름 1m에 600원을 관세로 내놔야 했으나 합작영화 딱지를 받아들면 1m에 160원만 물면 됐다”고 전한다. 홍콩 입장에서도 자국영화 수출액을 늘릴 수 있으니 요상한 편법을 거부할 리 없었고, 한국의 제작사 또한 왕우와 이소룡을 통해 권격영화 맛을 본 국내 관객의 관심을 끌기 좋았다.
“신필름도 많지. 우리의 경우는 편수 채우는 거보다도 돈 벌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가 합작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홍콩영화에다 우리 배우를 집어넣어가지고 한 경우(<서유기>)가 있고, 그 다음에 까꾸로 홍콩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우리가 맨들어가지고 중국영화처럼 들여보내는 게 있고.” (<여수407>) 신상옥 감독의 증언이 말해주듯, 위장합작에 너나 할 것 없었다. 그러니 “법의 맹점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우리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민족문화를 말살시키는 반민족적인 악랄한 상행위”라는 규정 또한 너무 가혹하다(그런 점에서 몇년 전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한·홍 합작 회고전은 늦었으나 온당하다). 이 무렵 위장합작 시비로 시끄럽던 충무로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좀 넓게 둘러보자.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우리모두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레저 붐이 일었으나 와우아파트가 무너졌고, 경부고속도로가 트였으나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살랐던 1970년. 근대화의 팡파르가 울리고 있는 동안 시내 음식점에서는 “병든 말 1천 마리가 한우로 둔갑해” 팔려나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땐 그랬다.
참고자료 <주간한국> <주간경향> <한국영화를 말한다> <동아연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