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휴가를 마치고 들어선 사무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수히 많은 빨간색 작은 동그라미들이었다. 사무실 한켠의 종이판 위에 붙어 있는 이 동그라미들은 얼핏 게임 화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너지 게이지’와 비슷하게 옆으로 뻗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종이판에는 이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빨간 동그라미는 그 이름들 옆에 붙어 있는 스티커였다. 몇몇의 이름 옆에는 10여개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던 반면, 달랑 몇개의 스티커만 붙은 이름도 있었고, 옆쪽의 드넓은 공간을 쓸쓸히 남겨두고 있는 이름도 존재했다. 종이판 위에 적힌 ‘독자 확장 캠페인 현황표’라는 제목을 굳이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마침내, 기어코 시즌이 돌아온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씨네21>과 모회사 <한겨레>는 ‘주간지 확장대회’라는 것을 개최한다. 그 말은 사원들이 <씨네21> <한겨레21> <팝툰>의 정기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분주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일간 신문을 포함해 대부분의 한국의 인쇄 매체는 이 같은 확장대회를 개최해 새로운 독자를 찾아내고 있다. 하지만 ‘확장’을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따져보면 막상 “잡지 한부 보실래요?”라고 권유할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자주 접촉하고 연락하는 영화사 임직원들의 경우 그들의 회사에서 이미 구독하고 있게 마련이고, 평소 거의 연락을 하지 않던 친구, 선배, 후배들에게 어느 날 불쑥 전화를 걸어 잡지를 권하기도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간지에 다니던 시절부터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확장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빨간색 동그라미들을 보니 미적거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빨간 동그라미를 얻지 못하면 빨간색 네모 카드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도 밀려왔다. 바로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열어 검색모드에 돌입했다. 김XX, 얘는 연락 안 한 지가 2년이네. 김OO, 이분과는 3년째 전화 통화만 하고 있지. 박△△, 이놈은 언제 봤더라…. 이런저런 푸념을 하면서 구독 가능성 높은 ‘후보자’의 리스트를 정리한 뒤 휴대폰 배터리가 닳아버릴 때까지 통화를 거듭했다. 결국 갖은 애교와 사정 끝에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는 데 성공은 했지만, 그 직후 마음속에 찾아온 건 뿌듯함이 아니라 희한하게도 외로움 또는 허탈감이었다. 전화번호부 속 이름을 속속들이 검색하는 동안,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관한 어떤 깨달음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나의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거의 없다. 둘째, 나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도 많지 않다. 셋째, 그러고보니 사심없이 연락하고 만난 사람은 정말 없다. ‘주변에 구독료 쯤 척척 내놓을 만한 돈있는 사람 참 없네’라는 한탄에서 시작된 내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결국 자책감으로 이어졌다. 그러고보면, 지난해 이맘때도, 그전 해 이맘때도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았던가. 이젠 깨달음을 몸으로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슬슬 든다. 더 늦기 전에 전화번호부 속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를 죽 돌려볼까보다. 아니면 ‘인간관계 확장 현황표’라도 만들어 빨간 동그라미를 붙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