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게 그렇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그 앞에 서면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단 말, 고맙단 말도 꼭 불 꺼진 방으로 들어가는 식구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삼킬 뿐이다. 중국의 젊은 여성감독 인리촨의 <공원>은 이렇듯 복잡하고도 허한 가족의 단면을 찬찬히 응시하고, 그 균열 사이로 조심스레 온기를 집어넣는다. 29살의 쥰은 베이징에서 독립해 살며 방송 리포터 일을 한다. 예고도 없이 상경한 그녀의 홀아버지는 딸의 집에 머물며 딸의 생활을 사사건건 간섭한다. 너는 설거지도 못하잖아, 마늘을 왜 안 먹니, 물건들 좀 제자리에 두고 살아라, 결혼 안 하니? 넌 이제 노처녀야. 아버지는 딸이 가난한 무명 작곡가를 남자친구로 둔 것이 못마땅해 인근의 호수 딸린 공원에 나가 짝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공원’에서는 결혼적령기 자녀를 둔 중·장년 부모들이 나와 서로 자식의 사진을 교환하며 조건을 묻고 중매 노릇을 한다. 다양한 사연이 있고, 다양한 부모-자식 관계가 있다. 사실 <공원>에서 다루는 가족이란 국가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흔한 세대차이와 갈등의 층위다. 데뷔작을 찍은 인리촨 감독은 “내 주변의 많은 여자들에게서 조금씩 이야기를 빼왔다”며 주인공 부녀의 삶과 관계를 애써 심오하게 포장하지 않고 딱 29살 여주인공의 눈높이에서 보고 수용할 수 있을 만큼만 의미화한다. 담백하고 섬세한 미덕이 쌓여 마지막 장면을 뭉클하게 한다. 9월7일 제2회 CJ중국영화제 개막작 게스트로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난 인리촨 감독은 구김살이 별로 없고 안정된 인상을 주는 쥰 또래의 아가씨였다.

-어떻게 이 스토리를 구상하게 됐나. =예전에 공원에서 자녀들을 위해 서로 소개를 나서는 부모들이 있다는 기사를 봤는데 그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 다시 그 공원을 찾아가 노인들을 직접 만나고 하나하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생각보다도 그들이 정말 많은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본인은 그럼 주인공 여성이 겪는 고민이나 스트레스는 없는가. =결혼문제는 아닌데 다른 문제로 스트레스는 받는다. 중국 부모들도 자녀에게 주는 압력이 많다. (웃음) 이 영화의 아버지 캐릭터에는 나의 아버지의 잔영이 있다. 내 아버지와 정말 유사하다.

-아버지 역의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그는 전문배우가 아니라 신체예술을 하는 분이다. 아버지 역할로 적합한 배우를 찾다가 주변에서 추천을 받았는데, 처음에 만났을 땐 머리도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고 복장도 굉장히 쿨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특별한 면이 있는 것 같아서 선택했다.

-다른 분야도 아니고 예술쪽 종사자라면 본인의 자아나 취향이 매우 강할 텐데, 영화 때문에 머리칼을 잘라야 하는 요청을 하는 게 쉬웠나. =설득은 별로 어렵지 않게 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자기를 촌스럽게 만들었다고 해서 나를 미워한 걸로 안다. (웃음)

-영화감독이 되기로 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프랑스에서 영화 공부를 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소설이나 시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국말로 ‘문예청년’이라는 게 있다. 나는 그런 쪽이라고 생각했다. 한 PD가 와서 내게 영화를 찍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내 글을 읽었다며 왠지 내가 영화를 만들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하더라.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보고 화장실 다녀오는 김에 잠깐 생각한 다음 바로 결정했다. (웃음)

-무슨 대화가 오갔기에 그렇게 쉽게 그 자리에서 결정이 가능했나. =나는 영화를 찍고는 싶었지만 투자자를 찾는 일이라든지 그런 제작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맞는 역할 같진 않았다. 그는 투자도 다 마련돼 있다며 내가 연출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할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작품도 준비 중인지. =이번에 돌아가면 바로 촬영이 시작된다.

-다음 작품은 어떤 내용인가. =현대를 배경으로 한 두 여자의 이야기다. 레즈비언 스토리는 아니다. 간단히 덧붙이면, 중국이 워낙 고속발전하고 빠르게 변하면서 사회 전체가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다. 사람들마다 가치관은 다르고 하루에도 정말 많은 일들이 도시마다 일어나고 있다. 이럴 때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꼽을 수 있는 건 바로 사람들간의 감정인 것 같다. 그걸 표현하는 게 목적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감독이 되고 싶은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요즘 같은 혼란한 시기에 사람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감정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리고 당분간은 아트영화를 찍는 걸 생각 중이다. 그리고 또, 나는 여성감독이기 때문에 남자들간의 형제애를 다루는 영화도 꼭 찍어보고 싶다.

-왜 여성감독이기 때문에 남자 얘기를 해보고 싶다는 건가. 인과관계가 어색하지 않나. =그 앞뒤 관계가 나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여자의 세계를 섬세하고 깊이 잘 표현하는 남성감독들은 정말 많지 않나. 여성감독들보다도 더 잘하는 감독들이 있다. 그러니까 여성감독들도 남자들의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