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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민의 미드나잇] 사실와 허구 사이, 두 로마인 이야기

시즌2로 돌아온 정통 사극 <로마>

<로마>의 두 주인공 풀로와 보레누스.

국내에서 인기를 끈 대부분의 미드들은 미국에서 지상파 혹은 일반 케이블TV 채널을 통해 방영된 15금 정도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폭력은 성인들이 볼거리가 상당하지만 섹스만큼은 일정 표현 수위를 넘어서는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섹스 & 시티> 정도가 그나마 표현 수위가 좀 높은 편에 속했지만, 아주 적나라한 수준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반면 섹스와 마약 거기에 폭력까지 버무려 연예계의 추악한 뒷모습을 담은 <더트>(<Dirt>)나 동성애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퀴어 애즈 포크>같이 본격적인 19금스러운 작품들은 시청률에 자신이 없어서인지 국내에서 방영이 아예 안 되거나 방영이 되었어도 폭넓은 층의 주목을 끌진 못했다.

그런 면에서 남녀의 성기가 그대로 노출될 정도로 본격적인 19금 작품임에도 국내에 많은 팬들을 확보한 <로마>(ROME)는 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금스러운 장면들을 잘라내면서까지 공중파에서 시즌1을 방송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엔 케이블TV에서 시즌2도 방송을 시작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터넷에서 다양한 시각에서 <로마>를 분석한 블로그나 게시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로마>의 폭넓은 인기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렇게 <로마>가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무엇보다 <로마>가 다루고 있는 묵직한 역사 자체가 차별화될 수 있었고, 국내에서 한창 무르익고 있었던 그리스/로마 열풍에도 시의적절하게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로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로마 역사에 실존했었지만, 정작 드라마의 주인공 두 사람은 로마를 다룬 역사책에서는 거의 언급된 적이 없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보레누스와 단순 무식하지만 자유로운 풀로, 이 두 주인공은 극중에서 카이사르가 말한 것처럼 ‘행운의 신이 지켜주는’ 군인들로 등장해 BC 52년부터 시작되는 로마 격동기의 역사적 사건들의 중심에 서서 시청자의 눈이 되어준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이 포레스트 검프같이 아예 가공된 인물은 전혀 아니다. 카이사르가 저술한 <갈리아 전기> 5권의 번역본(박광순 역)을 보면 두 사람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군단의 일급에 가까운 용감한 백부장 티투스 풀로와 루키우스 보레누스. 두 사람은 누가 더 우월한지를 가리기 위해 끊임없이 다투고, 또한 매년 격심한 경쟁을 통해 서로 지위를 겨루었다. 풀로는 보루 앞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자, ‘야, 보레누스, 꾸물대지 마라. 솜씨를 보일 절호의 기회다. 오늘은 승부를 결판내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곧 보루 밖으로 나가 적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보레누스도 모든 병사의 평판이 두려워 보루에 머물지 못하고 뒤를 따랐다. … 곤경에 처해 있던 풀로를 적이 포위했다. 바로 그때 호적수인 보레누스가 그곳으로 달려가 고전 중이던 풀로를 구했다. … 이렇게 보레누스가 포위되자, 이번에는 풀로가 그를 구해냈다.”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로마>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보레누스와 풀로는 11군단 소속으로 비슷한 지위를 가진 백부장이었다. 두 사람은 승진을 위해 경쟁하는 사이였지 <로마>에서처럼 보레누스가 상사, 풀로가 부하인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이 소속되어 있던 11군단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을 때 함께했던 그 유명한 13군단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이 속했던 11군단은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기원전 58년 창설한 군대로 13군단과는 분명히 달랐다. 따라서 <로마>는 <갈리아 전기>에 짧게 등장하는 이 두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낸 반허구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반허구의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로마>가 가진 역사드라마로서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점은 전혀 없다. 오히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던 영웅들과 그들의 주변 인물들을 민초의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는 독특한 설정의 기반이 되어 <로마>의 성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아닌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시각에서 <로마>가 만들어졌다면, 이전에 영웅의 시각에서 로마를 다루었던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들 속에 파묻혀 제아무리 19금스러운 장면들이 난무한다 하더라도 시즌2가 제작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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