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하르 코헨 감독은 인터뷰를 다소 어색해했다. 과감한 레게 헤어스타일에도, 체구는 작았고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전쟁통에 사귄 네덜란드 여자친구들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고백에, 그럼 그들을 찾아나서야겠다며 덜컥 유럽 여행을 계획한 기발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8월27일부터 일주일간 열리는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의 상영작인 <아버지의 선물>은 슐레이만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밟았던 자취를 뒤쫓는 다큐멘터리다. 전쟁의 화염 속에서 그는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를 거쳤고, 40여년이 지나 코헨은 아버지 슐레이만과 함께 당시 장소들을 되짚어간다. 부자의 친밀함과 일상의 유머가 풋풋하게 묻어났던 <아버지의 선물>은 실상 “2년간 철저하게 각본을 준비”해 완성한 작품. “나는 느린 사람”이라는 코헨 감독의 말을 들으니 침착한 눈 뒤에 숨어 있는 열정과 끈기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처음 아버지와의 여행을 담기로 마음먹었을 때 의도한 바는 무엇이었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는 유대인 여단에 복무했다. 그에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부자를 제외하면 해외를 여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가 자발적으로 참전한 데는 그런 이상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때가 아버지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는 젊고 건강했다. 나는 그가 과거의 장소를 찾아 당시 느꼈던 기쁨과 괴로움을 이야기하길 원했다. 또 한 가지. 그에겐 손자가 없다. 나는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손자를 보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주길 바랐다. 물론 아버지는 내 두 번째 의도에 대해 몰랐지만.
-상당히 이기적인 목적 같은데. =사실 그렇다! (웃음) 하지만 아이를 낳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오직 아버지를 위해 자식을 가진다면 똑같이 이기적이지 않겠나.
-그렇다면 배다른 형제를 찾을 수 없어서 실망했겠다. =아니, 조금 안도했다. 아버지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었으니까. 어딘가 존재할지 모를 아버지의 자식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동시에 그 사실을 숨긴다는 것이 힘들었다. 미래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네덜란드에서 상영되면 누군가가 갑자기 연락을 취할 수도 있겠지. (웃음)
-아버지가 영화를 봤다면 약간 언짢았을 수도 있겠다. 찍지 말라고 사정하는 장면도 다 찍었으니. =화를 내지는 않으셨다. 그저 그 장면들을 왜 넣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에겐 그 작품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으니까. 그가 즐겨본 것은 40, 50년대 할리우드영화들이다. 요즘 영화들은 리듬이 빨라서 따라잡기 힘드실 거다. <아버지의 선물>은 더 그렇겠지. 감정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작품이니. 처음 상영회를 열었을 때는 관객의 반응 때문에 아버지는 영화에 집중하기 어려워하셨다. 나중에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고 그러시더라. TV 앞의 쇼파에 앉아서 매우 집중해서 보시는데 막 웃다가 울다가 하시더라. 그는 이제 이해한다. 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전 여자친구, 가족 등 사생활을 많이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없었나. =처음에 나는 출연할 생각이 아니었다. 아버지만 출연시키고 홈비디오처럼 찍으려고 했다. 그러나 각본을 쓰는 동안 내가 반드시 출연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이렇게 사적이고 친밀한 영화를 만들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공동감독인 하릴 에프라트와는 어떻게 일을 나눴나. =하릴은 바깥의 일을 했고 나는 안의 일을 했다. 예컨대 그는 카메라맨과 함께 촬영을 지시한 반면 나는 아버지가 특정한 감정을 자아내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매우 균형잡힌 작업이었다. 사실 그는 아주 오랜 친구다. 나보다 훨씬 전에 영화를 시작해서 내가 학교를 졸업했을 때 이미 프로페셔널이었다. 그가 합류했다는 사실은 내게 매우 중요했다. 그가 없이는 이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영화연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무엇인가. =26살 때 영화일을 시작했다. 3번이나 영화학교에 지원했다. 내 시험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나보다. (웃음) 그전에는 음악가였다. 플루트를 연주했다. 당시 나는 음악적으로 벽에 부딪혀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했고 글쓰는 것도 좋아해서 곧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릴이 영화를 공부했던 것도 영화를 더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했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예루살렘에는 아름다운 석조건물들이 많다. 요즘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돈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바꾸려 하고 있다. 옛집들을 무너뜨리고 새 건물을 짓는 식이다. 예루살렘은 부유한 도시로 변하고 있지만 경관은 엉망이 되고 있다. 어떻게 만들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런 현상을 다루면 어떨까 한다.
-2006년 이스라엘 독아비브다큐멘터리페스티벌 대상, 2006년 이스라엘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2007년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대상 등 적지 않은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받았다. EIDF에서도 상을 기대하고 있나. =생각한 적 없다. (웃음) 좋은 영화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영화제를 즐기려고 여기에 왔지만 물론 트로피를 타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매우 가난하니까. (웃음) 적어도 예루살렘에선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많은 돈을 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