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위해 벌어야 한다.” 1961년 6월7일 <동아일보>는 ‘성림(聖林) 배우들의 부업’에 관한 가십을 다뤘다. ‘신흥귀족’이라고까지 불리는 ‘스타-아’들이 어찌하여 저잣거리에 나서게 됐을까. “인기란 주마등 같은 것이니 좋은 시절에 실컷 챙겨야 한다”는 신조 아래 투잡스에 여념없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면면을 소개한 이 기사는 선셋대로에 레스토랑과 의상점을 연 딘 마틴과 토니 커티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목장, 아파트 임대업, 유전사업 등처럼 전공과 완전히 동떨어진 업종에까지 손을 뻗쳐 짭짤한 수익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과거와 같이 사치와 현란한 꿈에만 갇혀 있지는 않다. 스타가 인기를 잃었을 때 어떻게 초라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 시절 충무로는 어땠을까.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부업을 옆구리에 낀 배우들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다방이나 차려서 조용히 살래요.” 이민자의 은퇴 선언처럼, 현역 시절의 명성을 앞세워 은퇴 뒤에 다방이나 카페를 차리는 정도가 외도의 전부였다. 1960년대 중반 들어서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으려나. <서울신문> 1964년 4월1일치에 실린 ‘스타와 부업’ 기사에 따르면, 촬영장 외에 다른 곳에 딴 살림을 차린 배우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불굴의 정신으로” 돈을 어떻게든지 늘리기 위해 애쓰는 스타들의 치부정신이 대단하다며 운을 뗀 기사였으나 신영균이 1천만원짜리 빌딩을 사서 그의 본업이었던 치과병원을 차린다는 소문 정도만이 눈에 띈다. 이를 제외하면 요정을 운영하는 양훈, 다방을 차린 전계현, 양장점을 개업한 전현주, 미장원을 연 김의향 정도. 대개 조연배우들이다.
가케모치 40편 출연으로 한해에 많게는 2천만원 넘는(당시 월급쟁이 평균 월 소득은 1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데 주연배우들이 굳이 부업을 벌일 리 없었다. 참고로 1961년 연간 극장 관객은 5860만명 정도였으나 불과 3년 뒤인 1964년에는 그 수가 1억명을 넘어섰다. 1969년 기준으로 극장 전체 관객은 1억7300만명. 이 같은 가파른 성장세는 1960년대 내내 한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가케모치와 대명(貸名) 제작의 병폐를 낳기도 했지만, 이 10년은 겉으로는 부족함없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다. 환상의 버블 시대에 누가 장밋빛 미래를 부인했을 것인가. 굳이 1960년대 배우들의 주된 부업을 꼽으라면 딴 짓이라고 보기 어려운 영화제작이었다. 최무룡, 김지미, 전택이, 이민 등 여윳돈을 굴리던 배우들은 직접 제작자가 되어 현장을 지휘했다.
“800만원짜리 무스탕을 몰고 다니던” 스크린 스타들의 세도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1971년 5월 <영화잡지>에 실린 ‘인기스타들의 부업을 찾아보니…’라는 제목의 기사는 “하루아침에 가장 위험한 직업을 갖게 된” 배우들이 부업 전선에 뛰어들어 “장래대비 눈치작전”을 펴고 있다고 적고 있다. 과거와 달리 주·조연 가릴 것 없이 딴 주머니 차기에 나섰다. 신영균은 다방, 다과점, 극장사업 등으로 사세를 확장했고, 윤정희 또한 충무로에 통닭구이 경양식 살롱 ‘희의 집’을 차렸다. 김지미도 뒤질세라 타베트라는 이름의 경양식 살롱을, 박노식은 ‘시네마 다방’과 ‘고고 양복점’을, 최지희는 웨스턴 스타일의 스탠드 바와 중국집 동경반점을, 그리고 남정임은 주유소를 개업했다. 이 밖에 주선태는 여관, 김희갑은 호텔사업을 펼치는 등 부업없는 배우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고무신 장사에 뛰어든 남궁원은 충무로 안팎에서 화제를 모았다. 화신백화점 뒤편에 경성고무 서울 총판 및 직매센터를 마련한 그는 직접 자신의 팬들에게 ‘부로마이드’를 나눠주는 판촉 활동까지 벌였다. “직매센터 설립의 주목적이 저를 아껴주시는 팬들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배우와 팬이 대화를 나눌 만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앞으로 이 가게에서 팬들을 만나 훈훈한 정감이 도는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고무신 직매장을 운영하게 된 까닭이 “팬과의 거리를 좁히고 소비자 보호를 위함”일까. TV와 레저라는 예기치 못했던 복병에 밀려 1968년부터 전국 개봉관 기준 관객 수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앞으로 닥칠 암흑의 1970년대를 예견하고 배우들이 자구책 마련에 나선 것은 아닐까.
“배우를 위해서 부업을 하는 것인가, 부업을 위해서 배우를 하는 것인가.” 여기저기서 배우들의 세태를 꼬집었지만, “부업은 유행일 뿐 나의 본업은 연기”라며 시치미 떼고 돌아서서 돈 세는 배우들을 어쩌진 못했다. 1970년대 말에 가면 배우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감독들까지 ‘우리도 돈 좀 벌자고요’라며 부업 일선에 나섰는데, “개런티 500만원 확보 요구”만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감독들은 너도나도 기사식당, 일식집, 액세서리 회사 등을 오픈해 사장님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30년이 흐른 지금, 충무로의 풍경은 어떤가. 몇년 동안 잠적해 소식을 알 수 없었던 감독 K가 분식집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듣긴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