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정말 좋아.’
SBS 특별기획 <칼잡이 오수정>의 오수정(엄정화)은 이 여섯 글자를 가감없는 진심으로 꼭꼭 씹어 내뱉을 줄 아는, 드라마나라의 흔치 않은 ‘금성녀’다. 착하고 꿋꿋하게만 살면 왕자의 백마 뒷자리에 동승할 수 있음을 증명해온 숱한 신데렐라들이 본다면,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욕망을 주저없이 표현하고 안달 떠는 그가 미련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환상의 커플>의 태생부터 유아독존 공주인 ‘조안나’(한예슬)도 아니면서 ‘됐거든’ 하며 콧대 높은 말투를 일삼는 모습은 주제 파악 못하는 34살 노처녀의 철없음을 보여준다. 사법고시에 떨어졌다는 이유로 정혼자를 결혼식 당일 ‘뻥’ 차버렸음에도 그가 짱짱한 킹카가 돼 돌아오자 다시 눈에 ‘하트 광선’을 켜는 뻔뻔함은 드라마 사상 가장 밉상인 여주인공이 탄생했다고 선언하고도 싶어진다. 한편, 그의 배신이 없었다면 뚱뚱한 ‘고만수’가 몸짱 ‘칼 고’(오지호)로 변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오수정은 어찌보면 미필적고의의 ‘평강공주’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어리석게 적극적인 신데렐라의 철판 깐 왕자 찾기 여정이 따끔따끔 가슴을 찌르고 있다. ‘짝짓기’의 험난한 바다에서 ‘운명의 사랑 따윈 필요없어’라는 말을 슬슬 공감하기 시작한 이들에게 오수정은 부정하고 싶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현실의 거울이어서일 것이다. 게다가 갖기도 싫고 남 주기도 싫은 ‘칼 고’를 향해 어슬렁거리는 또 한명의 ‘신데렐라 지망생’ 육대순(박다안)의 존재는 금성녀와 화성남 사이에 부유하는 ‘연애의 해법’ 혹은 ‘작업의 정석’을 엿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남자를 사로잡는 제1 비법은 ‘연약한 척하기’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내숭녀 육대순을 통해 전형을 깬 여성의 대립각을 세우고, 뛰는 놈 위에 나는 연애술사의 전법도 소개한다.
생략, 과장, 유머 등의 만화적인 화법 아래 단순명쾌하게 현실 속 속물근성을 도려내 조명하는 이 드라마는 오수정과 육대순의 연애 배틀을 현실에 대입해 제법 적극 관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전형성과 솔직한 파격을 아우른 역전된 ‘금성녀들’이 생생하게 뛰어놀고 있다면, 오수정을 향해 가짜 재벌(강성진)을 덫으로 놓아 복수극을 도모한 ‘화성남’ 고만수는 좀 모호하다. 애증을 기반에 둔 복수극 자체가 오수정에게 진정한 사랑까지 포함된 완벽한 인생역전을 선사하는 해피엔딩을 암시하고 있음에도 칼 고의 경우 성공남의 속물근성이나 보편적인 욕망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오수정과 육대순은 드러내느냐, 감추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속으로 주판알을 굴린다는 것은 장군멍군이다.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을 산산조각 부순 옛 여인 오수정보다 비 오는 날 부침개를 부쳐주고, 구슬 같은 눈물도 떨어뜨리며 가슴에 파고드는 어린 육대순에게 더 끌릴 법한테 칼 고의 시선은 이를 갈든, 연민하든, 오수정에게만 향해 있다. 그는 양의 탈을 쓴 여우한테 잘 무너지는 현실의 남성과 달리 ‘판타스틱’하게도 사랑과 정의 질긴 생명력을 증거하는 드라마 속 왕자의 전형만 취하고 있다. <칼잡이 오수정>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금성녀와 화성남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차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