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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남자’를 벗다

<리턴>의 정유석

영화 <리턴>이 제시하는 추리게임은 사지선다형이다. 관객은 류재우, 강욱환, 오치훈, 장석호 등 네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누가 범인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네 가지 보기 모두 의례적으로 찍을 수 있는 3번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정유석이 연기한 장석호는 저만치 떨어져 1번이나 4번인 척을 하고 있는 얄미운 보기다. 영화가 나머지 3명이 빚어내는 갈등을 주시하는 동안, 장석호는 이야기의 주변을 맴도는 듯하면서도 천천히 그들의 갈등으로 스며든다. 재우와는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한편, 의사라는 자신의 일에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장석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쇄살인의 음모에 휩쓸리면서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혈중알콜농도에 따라 태도가 돌변하는 천수를 연기한 정유석은 이번에도 선한 듯, 악한 듯 종잡을 수 없는 외모와 조용하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장석호의 다중적인 모습을 묘사했다. “드라마 <올인> 이후 악역을 추구하려 했던 건 아니었지만 나한테도 악한 느낌이 있나보다. 내가 잘했다기보다는 박진표 감독이나 <리턴>의 이규만 감독이나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 부각시켜준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가 관객의 눈에 각인되었던 역할은 대부분 “썩 유쾌하지 않은 남자”였다. <올인>의 임대수는 자신의 형을 죽음으로 내몬 주인공 인하에게 징한 복수심을 품은 한편, 조직 내 2인자로서의 서러움을 간직한 남자였고, 아침드라마 <김약국의 딸들>의 홍섭은 비열한 엘리트지만 신분에 대한 열등감에 빠진 남자였다. “주위에서는 다들 왜 그런 역할을 했냐”고 물었다지만 이전까지 연기생활의 대부분을 소심하거나 유약한 남자로 살아야 했던 그에게는 비로소 연기에 ‘올인’할 수 있었던 기회들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연기에 쏟아부었지만, 한편으로는 연기를 하는 게 정말 싫었다. TV관계자들이 아무리 내 이미지가 착하고 모범적이라고 해도 그게 나에게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배역의 깊이든 연기의 폭이든 모든 게 좁은 시절이었다. 사실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가 않다. (웃음)”

그럼에도 다시 떠올려보자면, 정유석도 한때는 청춘스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배우다. 영화 <인생은 객관식 시험이 아니잖아요> <있잖아요. 비밀이에요2> 등을 통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이후 충무로에 불었던 청소년 영화의 트렌드 한복판에 있기도 했고, 90년대 중반 공중파 방송 3사가 캠퍼스 드라마의 붐을 이끌 때도 그는 SBS <열정시대>에서 두꺼운 안경을 쓴 컴퓨터공학과 학생을 연기했다. 뿐만 아니라 입대 직전에 출연한 <촛불켜는 사람들>에서는 뇌성마비 환자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연기파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연히 그 작품들에서 정유석은 언제나 착한 남자였다. 짝사랑을 앓고 있지만 고백을 하기에는 말이 따라주지 않거나, 자신의 의지보다는 다른 이의 손짓에 끌려가는 남자. “변신이 아닌 변화”를 꿈꾸던 그로서는 “연기생활이 아닌 사회생활”이었을 만큼 답답한 시절이었다. “나의 연기인생은 이제부터 비로소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주위에서는 내가 너무 늦은 게 아니냐고 하지만, 오히려 서른을 넘은 지금이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때인 것 같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천천히 성장한다면 그것도 어디까지나 성장인 거니까.” 이제는 들어오는 배역이 대부분 악역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로서는 별 부담이 안 되는 눈치다. “나는 평생 연기를 할 거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10편의 영화를 했을 즈음에는 사람들이 내 이미지를 보기 전에 내가 어떤 배우인지를 이야기해줄 것이다.” 가야 할 길이 바쁜 그의 다음 역할도 악역이다. 김원희와 함께 출연하는 드라마 <과거를 묻지 마세요>에서 정유석은 대기업 고문이자 살인을 한 과거가 있는 초능력자를 연기할 예정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스러운 악역”이란다. “김원희씨랑 출연한다고 하니까 다들 <헤이 헤이 헤이>를 생각하는데, 둘 다 진지한 역할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황당하겠지만, 단순하게 허구라고 인정하면 재밌을 만큼 만화적인 캐릭터라서 욕심이 생겼다.”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인지, 올해 서른여섯인 나이에도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별 생각이 없단다. “독신주의는 아닌데, 결혼에 대한 개념이 없다. 아직까지는 그냥 편하게 술마시고 들어가고 싶을 때 집을 찾고 싶다. (웃음)” 아마 이제 막 착한 남자에서 벗어난 그가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 결혼식장으로 들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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