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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공주님 알현, 배우님 발견

새삼스럽지만 기자의 재미는 발견이다. 추적을 통한 특종이든, 탐사를 통한 분석이든, 취재원 수위를 넘어 발전된 우정이든 애정이든…. 사회를 뒤집어놓는 건 물론 송사에 휘말리는 것조차 발견의 쾌감으로 적어두는 선배들을 본 적이 있다. 전염일까. 비의 해외 공연이 잇따라 취소, 연기되는 이면을 발굴한 <PD수첩>을 보면서 ‘저 PD 선수, 취재하면서 신났겠다’ 싶어 잠시 부러웠다. 고생했을 발품은 내 알 바 아니다.

영화기자가 누리는 발견의 재미는 섬뜩한 작품과 만났을 때가 당연히 일순위,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람 발견의 재미와 그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편식이 심해서 그 발견 후보자 중에서 스스로 빼놓은 리스트가 있는데, 그중 첫째가 배우다. 인공적이든 아니든 스크린에서 맡는 향기가 더 좋기도 하거니와, 잠깐 만나보고 어떻게 사람을 알겠냐는 회의적 소극성 탓도 있다. 나에게 배우는 그냥 공주님이고 왕자님이면 된다. 그 기품과 위세가 작품에서 녹슬지 않으면 불만없다. 스캔들? 왕실의 특권이자 숙명 아닌가.

기자의 행운인지, 이 편식을 손수 깨뜨려주시고, 발견 리스트에 올라가주시는 배우가 조금씩 늘고 있다. 음~, 꼽아보니 대체로 공주님이다. 세상사 그렇듯 높으신 분이 미천한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속내를 맞춰주시면 감동한다. 같은 작동원리다. 처음은 김지수였다. 촬영장 새벽에 어찌하다 기자로는 홀로 남았고, 그와 몇몇이서 조촐한 호프집에서 더위를 좇게 됐다. 공주님의 솔직발랄한 직설화법이 즉각 나를 사로잡았다. 스크린 속의 느끼한 자신을 보면서 재수없다고 손가락질하는 모습도 재밌다. 김0선과 처음 대면한 곳도 새벽의 어느 술자리였다. 옆에 앉게 됐고, 뭔가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고, 금방 빠져들었다. <씨네21>의 이름을 믿은 건지, 내 인상을 긍정적으로 봐준 건지 신상에 관련된 속내를 풀풀 털어놨다. 프로페셔널한 배우의 자세가 아니라고? 그러든 말든, 일단 그 순간만은 발견이다. 또 <커피프린스 1호점>을 우연히 보다 누군가가 시선을 끌었다. ‘눈매는 김희선을 닮았는데 분위기는 훨~씬 좋은데 누구지?’ 그러니까 난 그때까지 채정안을 몰랐다. 인연이 닿으려 했는지 내가 그의 인터뷰어로 낙찰됐다. 프로페셔널한 영화기자답게 담담한 맘으로 나갔는데, 아차 싶다. 말이 그렇게 속사포 같고 써먹을 내용이 많은 줄 미처 몰랐다. 녹음기를 빠뜨리고 간 건 절대로 프로페셔널한 자세가 아니다. 정신없이 받아적다가 몇 차례 되물었다. “이 말 너무 재밌고 적나라한데 그대로 써도 되나요?” 이 질문을 세 번째쯤 던질 때, 그 공주에게 빠져버렸다. 사적인 대화는 없었는데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만난 김정은도 이런 경우다. 스크린의 향내보다 자연물 그대로에 더 취해버린. 배우의 발견 시리즈가 주는 개인적 재미가 쏠쏠하다.

보통, 기자의 발견이 곧 그 매체의 발견이고, 그 사회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머리가 무거워지지만 영화기자의 의무는 상대적으로 가벼우니 말이라도 세게 하자. 발견을 게을리한다는 건 밥벌이의 윤리를 위반하는 거다. 하긴 윤리가 밥먹여주나. ‘이류’ 신문사 기자들이 유력한 대선 후보의 미심쩍은 땅투기 의혹을 발품 팔아 발견해 만방에 알렸더니, ‘일류’ 신문사 기자들이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 따지기는커녕 어디서 그런 단초를 제공받았느냐고 음모설 제기에 바쁘다. 발품을 묶어놓는 기자실 수호에 무조건 앞장서는 것도 좀 이상타. 피땀 흘린 발견은 헐값에 유통된다. 자의, 타의로 기자는 3D 직종의 부정형이 되어간다. 코끼리 뭐 만지기에 불과한 기자의 발견이 그나마 적어지면 감춰놓는 건 자꾸 커진다. 기자의 발견이 적어지는 땅, 아~ 재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