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초상> EBS/화요일 밤 10시50분/50분 <지식채널e> EBS/월∼금요일 밤 10시40분/5분
다큐멘터리가 말하지 않는다. 아니,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말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이다. 당사자의 육성을 타고 진행되는 인물다큐멘터리 <시대의 초상>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흔히 시작부터 끝까지, 화면을 해석하고 흐름을 주도하며 관객의 귓가를 장악하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빈자리에 들어선 것은 상징적이고 때로는 시(詩)적인 문자들, 간결한 스케치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그리고 무엇보다 지독히도 은유적인 영상 구성들이다. 첨예한 갈등의 양상이 바둑판의 대국으로, 지워지지 못할 상흔은 살갗 위 촘촘히 모인 성냥의 점화로 드러나는 식이다. 이문열, 권인숙, 김부선, 이용수, 한비야, 신철 등 문학, 예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좌와 우, 이념의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시대의 초상>에 목소리를 빌려주었다. 총 8명의 PD가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을 탄생 시점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견인해온 CP는 바로 김현 PD다. “사실 대중적인 형식은 아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닌, 보는 사람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더 많이 주고 그들이 직접 진실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시대의 초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2005년 등장해 고요한 파문을 일으킨 <지식채널e>가 있다. 5분이라는 시간 안에 ‘지식’을 전달하되 백과사전적 사실의 나열이 아닌, 지식을 바라보는, 세상을 해석하는 ‘관점’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 <지식채널e>에도 역시, 내레이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레이션 대신 글자가 들어가는데 그것도 희미하게 들어갔다. 자막도 크고 진하게 꽉 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강요라고 생각했다.” 줄임으로써 풍성해지는 역설의 미학, <시대의 초상> 역시 같은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애니메이션과 그래피티를 넘나드는 형식적인 실험은 테크닉의 향연이라기보다는 보는 이의 가슴을 두드리고, 상상력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다큐의 행간을 넓히기 위한 작업에 가깝다. “PD가 8명이다 보니 경쟁이 치열하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보고 자극받아서 더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된다. 또 시간적으로도 그만큼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양질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모든 프로그램이 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래 김현 PD가 마음을 두었던 것은 연출보다는 연기쪽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올라 공익 근무를 하던 시절에도 연극을 하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달음질을 치는 청춘이었고, 90년 방송사에 입사한 뒤 지금까지도 짬을 내서 연극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먹고살기 힘드니 연극은 취미로만 해라”는 선배의 말이 단초가 되어 PD 세계에 들어서게 됐지만,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부대끼는 다큐멘터리는 또 다른 매혹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다큐매거진 현장> <다큐 이사람> 등을 거치며 스스로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던 김현 PD는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들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뒤 말 못할 고초를 겪어야 했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재향군인회에서 시위하러 온다고 집회 신고가 들어오고, 국가정보원에서 원고 좀 보자고 전화가 오고 그랬다. 당시 사장님이 날 보더니 간첩이냐고 묻더라.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웃음)”
제작에서 쫓겨나 배치된 곳은 엉뚱하게도 홍보팀이었고, 그 다음은 사장 비서 자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교양문화팀장으로 제작의 자리에 서게 됐지만, 얼마 전 얄궂은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맞이해야 했다. 에로 배우, 미혼모, 마약쟁이 등 숱한 편견의 굴레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 진한 울림을 전한, 또 대마초 합법화라는 첨예한 이슈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선택한 제작진의 선택이 돋보였던 <시대의 초상> 김부선 편을 놓고 경영진과 마찰이 생겼고, 프로그램의 존폐가 논의되는 상황에서 팀을 떠나게 된 것이다. “시청자들 반응도 좋았고,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경영진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방향이 달랐나보다. 프로그램을 중간에 없애겠다고 해서, 그럴 거면 차라리 그냥 나를 바꾸라고 했다. 8월까지는 방영될 예정이지만, 그 뒤에는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 한번의 풍랑. 하지만 불행 중 찾아온 기회일까. 그는 이제 기획다큐팀 소속의 PD로 다시 현장 한가운데 서게 됐다. “난 사실 콘텐츠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연거푸 손사래를 치지만, 바로 어제 발령이 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그의 수첩에는 다음 다큐멘터리에 대한 구상들이 이미 빼곡하게 적혀 있다. “막 출근하면서 써본 거다. 지금까지 나왔던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형식을 해보고 싶은데…. (수첩 넘기며) 아, 지금 머리가 복잡하다. (웃음)” 모든 PD가 그러하겠지만, 방송사는 그에게 창작의 무대를 마련해주는 동시에 그것을 제약하기도 하는 이중의 권력으로 존재해왔다. 입사 17년차. 지금도 그는 시스템과 부딪히고 그것에 도전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시대의 초상>은 어쩌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탄생시키고 이끌었던 이들의 열정과 정신만큼은 온전히 살아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김현 PD는 누구보다도 그 ‘진실’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