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에 남자들의 치맛바람이 세졌다.
여자의 탈을 쓴 남자들이 예능 프로그램 곳곳을 발바닥에 땀나듯 누비고 있다. SBS <헤이헤이헤이 시즌2>에서 할머니가 됐다가 뽀글뽀글 파마머리의 김희애도 됐다가 하는 신동엽이‘여장의 지존’인 줄로만 알았는데 최근에는 다른 막강한 후보도 생겼다. 신동엽과 함께 ‘거물 MC’로 불리는 유재석은 MBC <무한도전>을 비롯해 그 밖의 고정 프로그램에서 미스 서울 진 ‘유재니’, <은하철도 999>의 메텔 등으로 변신해 치렁치렁 가발을 휘날리고 있다. 스쿨시트콤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KBS2 ‘해피투게더 학교가자’에서는 아예 단발머리 여고생이 돼 처음부터 끝까지 가늘고 상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초의 울뚝불뚝한 체격을 지닌 이혁재마저 비련의 정실부인 역을 맡아 단아한 쪽진 머리스타일까지 선보였으니, 캐릭터나 외모를 막론하고 웃음을 찾는 이들 누구에게나 여장은 ‘몸개그’의 필수항목으로 자리잡은 듯 보인다.
‘미스 어느 학교’를 선발하는 여장 놀이야 남학생들의 학창 시절 추억담에 한 페이지를 장식해온 전통적인 것이고, ‘귀곡산장’의 이홍렬 할머니 등 걸출한 여장 캐릭터도 오래전부터 등장해온 것이라 브라운관에 범람하는 성전환쇼가 새삼스럽지도, 서걱거리는 이물감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같은 남자의 변신은 부담없고 거뜬하며 재미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행하는 쪽이나 감상하는 쪽이나 좀더 적극적으로 향유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본래의 성 정체성을 강화하는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었을 때보다 반대의 성으로 변신해 꽃보다 아름다운 무엇, 혹은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을 발현한 순간이 오히려 해당 남자 연예인에 관한 인상적인 명장면으로 캡처돼 네티즌의 소장목록에 오르는 게 요즘의 풍경이다. ‘여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 연예인은 누구일까요’와 같은 앙케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도 은근히 자랑스러운 훈장이 됐다.
매력적인 남성상을 향한 인식의 변화도 이러한 현상을 만들었을 테지만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출몰하는 ‘남자의 여자 되기’는 일단 남자라는 이름의 굴레를 벗고 거침없이 일탈의 해방감을 만끽하는 장치로서 유용한 외투 역을 담당하는 듯 보인다. 또 남성의 눈동자에 입력된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엿보는 거울 역도 겸하고 있다.
<무한도전>의 산만한 사나이들이 드레스 차림으로 미녀들의 대회용 ‘스마일’을 좀더 과장되게 표현하고, 미모와 지성 대신 몸이 뒤엉키는 체력을 겨루며 미스코리아대회를 따라잡은 에피소드는 여성을 가장한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세계를 비틀어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해피투게더-학교가자>에서 남녀출연자들 모두가 굳이 세일러복을 입고 콧소리를 내며 추억의 토크를 나누는 것은 여성의 수다가 지닌 내밀하고 친밀한 장점을 활용하려는 제스처다. 여장을 취한 남자들은 의외성의 볼거리로 웃음의 시동을 건 뒤 쑥스러워하는 듯하다가 결국 남자일 때보다 더 망가지는 모순된 행동으로 남자의 정체성을 여성과 구분짓고, 또 확장하는 교묘한 효과를 빚어낸다.
한데,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남자 같은 여자 윤은혜가 남성들과 입 맞추고 어깨동무하며 이성애와 동성애의 묘한 경계로 여심의 가슴에 떨리는 ‘터치’를 가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방송가에서 남장여자는 여장남자만큼 흥미로운 종목은 아닌 것 같다. 여성 개그맨에게 털털함과 뻔뻔함을 요구하는 코미디의 기본 속성상 여자가 남자로 성을 ‘체인지’해 얻을 반전의 효과는 크지 않다. 여장남자는 웃기지만, 남장여자는 별로 웃기지 않는다.
별의별 데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이 성차별은 이미 여성에게 남자로 변신한다는 게 일탈이 아니라 어느 정도 체화돼 있는 사회적인 생존전략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장여자와 여장남자의 사이에도 반대 성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