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임용시에 제출한 학위 증명이 문제가 되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가 제출한 서류가 위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이 풍문을 접하면서 좀 다른 관점에서 얘기하고자 한다.
서구의 대학제도는 그 체제를 길드조직에서 빌려왔다. 장인 밑에서 일정한 수업을 받은 도제가 훈련을 마치고 일을 시작하고 그것을 장인이 인정하면 그 도제는 비로소 장인이 되어 자신의 휘하에 새로운 도제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14세기 서구의 대학이 받아들이면서 지금과 같은 학위제도가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학위라는 것은 이제 당신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증명이다. 그래서 ‘교수’라는 직함은 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뜻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인 학위와는 달리 일정한 학문적 업적이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엄밀히 말하면 직함이기보다는 호칭에 가깝다. 그래서 서구에서 ‘교수’는 반드시 대학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뜻하지도 않는다. 정리하자면 ‘학위’는 ‘교수’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간) 복잡한 서구의 제도가 한국의 근대와 교육제도로 직수입되면서 ‘교수=학위’ 혹은 ‘교수=학위=자격’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물론 서구에서도 ‘교수’는 일정한 학위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학생들을 가르칠 필요로 없고 대학에 적을 둘 필요도 없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그 사람의 ‘능력’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근대의 문제가 발생한다. 즉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격을 갖는 게 아니라, 자격(제도)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학사회에 돌고 있는 풍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는, 그러니까 탈제도적 행위로 인한 기회 상실감 때문이다. 교수 임용에는 지원자들에게 일정한 자격을 요구한다. 거기에는 학위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교수 임용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이 자격을 갖기 위해 십수년간 공부를 하며 시간과 돈을 들인다. 그러나 학위가 꼭 능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근대의 조건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이 근대의 맹점을 우리는 보완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제도가 보장한 공정한 기회에 구멍을 내고 부당하게 대학에 자리잡은 사람의 ‘능력’을 따져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없다. 서구는 자신들이 근대를 기획했으므로 이 맹점에 대해 대학사회의 자율성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서구의 근대를 수입해야 했던 우리로서는 이 맹점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근거가 사실 취약하다. 그로 인해 누군가가 제도에 구멍을 냄으로써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도 자체로 인해 애초에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학위 증명을 허위로 제출한 사람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풍문을 통해 나는 우리의 근대와 우리의 근대를 이루는 조건들을 다시 한번 재고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육의 파행에 대해서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모두가 인정하면서도, 개혁의 합의에 대해서는 난항을 겪는 것도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재고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근대가 만든 확고한 제도를 좀더 느슨하게 만들며 가야 할 때다. 딱딱하고 완고한 제도에서 물렁물렁하고 좀더 느슨한 제도로의 이행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