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씹어대는 글만 썼더니, 결국은 한 칼럼 때문에 사단이 났던 터라 오늘은 오랜만에 마음을 가다듬고 칭찬을 좀 해보련다.
요즘의 CF들을 보면 스타일이 참 화려하고 아이디어들도 톡톡 튄다. 모델들이 나와서 제품을 손에 쥐고 살며시 미소 지었던 80년대까지의 광고들과 비교해보자면 정말이지 놀라운 이야기. 초당 돈이 수천만원씩 들어간다는 엄청난 CG로 눈을 현혹시키는 광고들도 있고,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정도의 노출을 자랑하는 미남미녀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초등학생도 무이자, 무이자를 흥얼거릴 정도의 강력한 CM송도 있고, 발음도 알아듣기 힘든 외국 미녀들의 귀따가운 수다를 갖다붙여 짜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무조건 웃기고 보는 광고도 있고 저 멀리 할리우드 스타를 모셔오기도 하지. 정말 어떻게든 눈길 한번 더 받고, 좋다는 얘기 한번 더 들려주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CF들을 보고 있자면 재미있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최고의 파티셰가 준비한 눈 돌아가게 화려한 각종 케이크와 아이스크림, 초콜릿도 매일같이 그것만 먹다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고 질리는 법. 유럽에서 크림 파스타를 먹던 차승원이 괜히 고추장을 부르짖으며 우는 게 아니다. 이럴 때는 정말 담백하고 깔끔한 맛의 밥과 국 한 그릇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치장한 듯 안 한 듯 조용한 CF들이 오히려 더 강력할 수 있더란 얘기.
우선 주가가 1900선을 돌파한 이 마당에 증권사 광고들을 한번 보자. 다들 안경 쓰고 핸섬하고 ‘미쿡’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듯한 모델을 내세워 치밀하고 명석한 전문가의 분석을 믿어보라며 손짓한다. 그런 와중에 안경미남 하나 없이 뜬금없는 새소리만 울리는 증권사 광고가 있다. 철새 떼가 잔뜩 모여 있는 호숫가, 새들이 후드득 날아올라 V자를 그리며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길을 안내하는 단 하나의 새. ‘파이낸셜 리더’라는 슬로건과 함께 그 새에 로고가 덧씌워진다. 어머나. 돈이나 증권과는 하등 관계없는 단 하나의 비주얼에 강력하지만 담백한 카피가 절묘하게 어울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CF는 오로지 ‘리더’라는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는 데 15초를 바치고 있다.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을 대담하게 포기한 대신 쉽게 얻을 수 없는 깊은 신뢰감과 보는 이의 머릿속에 깊이 파고드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조용히 남겼다.
그리고 최근 연속해서 ‘비행’ 시리즈를 내놓는 대한항공도 그 심플하지만 깊은 맛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비행기나 어여쁜 스튜어디스는 아예 화면에 나오지도 않는다. 대신 비행기가 데려다 줄 수 있는 가장 특별한 곳을 우리 눈앞에 펼쳐놓는다. 몽골에 이어 이번엔 알래스카다. 눈으로 덮인 땅을 나는 새, 눈 언덕을 달리는 개썰매, 축제인지 놀이인지 하늘로 솟아오르는 에스키모 등 낯설지만 아름다운 화면을 아무런 설명없이 그저 한가득 풀어놓는다. 그러면서 잠시 하늘과 맞닿은 화면에서 멈추어 단 하나의 카피 ‘비행’이라 얘기할 뿐이다. 광고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와아, 나도 저기로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180도로 젖히는 의자와 널찍한 좌석과 최고급 요리를 서빙하는 스튜어디스는 내 주머니 사정으론 꿈도 못 꾸는 종류의 것이지만 미지의 여행지,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것이기에 이 광고는 울림이 있다. 심플하고 조용하지만 정확하게 보는 이의 묻어둔 꿈을 겨냥하여 자연스레 자신들의 브랜드와 연결시키는 현명함.
광고를 하는 기업은 대부분 욕심이 많다. 우리 브랜드의 좋은 점을 모두 광고에 담고 싶어하며 시끄럽게 주목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광고를 만드는 이들은 그 요구를 들어주려 하다가 죽도 밥도 아닌 것을 내놓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두 CF는 그 함정을 명민하게 피해 심플함이 때로는 최상의 답임을 보여주고 있다.
창던지기 선수의 창은 방울장식이 달리지도 않으며 삼지창도 아니다. 아무런 장식없이 끝이 단 하나로 모아진 뾰족한 창, 그것이 가장 멀리 정확하게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