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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2001-10-24

도정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내가 당한 것만큼 갚아준다”라는 것은 분명 인간의 정의감을 충족시켜주는 데가 있다. 복수의 문화가 질긴 생명력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정의구현의 한 양식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공정성은 정의의 조건이며, 복수의 문화에서 이 공정성은 교환의 공정성이다. “내가 이만큼 아팠으니 너도 그만큼 아파야 한다”랄 때의 ‘이만큼’과 ‘그만큼’의 크기를 갖게 하는 것이 교환의 공정성이다. 이 양적 공정성에는 때로 ‘같은 것의 교환’이라는 요구가 따라 붙는다. 실연당하고 석달열흘 눈물 세 바가지, 콧물 두 바가지 흘린 사람은 ‘그 나쁜 놈’에게도 눈물콧물 도합 다섯 바가지를 흘리게 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유혹에 곧잘 빠진다. ‘눈물 세 바가지에는 정확히 눈물 세 바가지를, 콧물 두 바가지에는 반드시 콧물 두 바가지를’의 복수법은 교환의 양적 동일성과 교환물의 형태적 동일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이것이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흔히 요약되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이다.

동태복수를 문화적 관행의 차원을 넘어 ‘법’으로 제정한 것이 3700년 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이다. 총 282조의 이 법전은 제196조에서 ‘눈에는 눈’을, 197조에서 ‘뼈에는 뼈’를, 200조에서는 ‘이에는 이’를 법적 정의로 규정하고 있다. 형사적 사안 아닌, 요즘으로 치면 민사적 사안이랄 것에 대해서도 이 법전은 어김없이 동태보상의 원칙을 적용한다. 이를테면 목수가 누구 집을 잘못 지어 지붕이 내려앉고 그 통에 집주인의 아들이 깔려 죽을 경우 공정한 보상방법은? 목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다. 집주인의 딸이 죽으면? 목수의 딸이 죽어주어야 한다. 집주인이 깔려 죽으면? 물론 목수 자신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현대 코미디물의 대본 작가들이라면 이 법전으로부터 재미난 대사들을 수태 만들어낼 만하다. 개에게 엉덩이를 물리면 “너도 개 엉덩이를 물어라.” 고양이가 생선을 훔쳐가면? “너도 가서 고양이의 생선을 훔쳐라.”

그러나 웃을 일이 아니다. 근동(近東) 아시아에서 발원한 동태복수의 문화는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서양 문명의 양대 초석이 된 히브리 문명과 그리스 문명에 전승되고 지중해 일원으로, 그리고 이슬람 전통 속으로도 퍼진다. 가족 성원을 죽인 자는 반드시 찾아내어 죽여야 하는 것이 그리스 신화에서의 피붙이의 신성한 의무이다. 복수하지 않는 자는 되레 신의 응징을 받는다. 히브리 구약(舊約)의 문화에서도 동태복수는 예외 사항이 아니다. 쿠란(Quran) 경전에도 ‘자비’를 말하는 대목과 나란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문자 그대로 적혀 있다. 물론 이런 전통들이 동태복수의 딜레마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복수의 순환고리에 걸리는 순간 당사자 쌍방은 눈이 다 빠지고 이빨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서로 씨가 마를 때까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순환고리를 끊고자 노력한 문명의 흔적들은 역력하다. 그리스의 경우, 서사시 <호메로스>는 많은 사람들을 죽인 오디세우스를 보복의 고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대화해’의 이야기로 끝나고, 어머니를 죽여 아비의 죽음을 갚는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 오누이에게 아테나 여신은 신문명의 여신답게 ‘무죄선고’를 내린다. 이런 이야기들은 동태복수의 고리를 차단하고자 한 고대 그리스 사회의 문화적 번민을 보여준다. 히브리 전통의 경우, 가장 극적인 단절 선언을 내놓은 것은 신약의 나자렛 예수이다. “누가 당신을 친다면 어찌 하겠소?”라는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 뺨을 갖다 대라. 이 답변이 동태복수의 문화에 익숙해 있었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었을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동태복수의 문화는 없어졌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나치, 파시즘, 중동 분쟁 등 20세기 모든 갈등의 장면들에서 그 문화는 소멸한 적이 없다. 외신은 지난 10월17일에도 이스라엘 각료 한명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팔레스타인의 어떤 조직이 보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수장면은 지금 미국과 테러조직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더 크고 본질적인 장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