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도 맹세를 한다는데요?” 토요일 오후에 집에서 쉬다 휴대폰을 받았다. 2006년 2월로 기억된다. <한겨레21>에 몸담을 때였다. 지금은 <한겨레> 매거진팀에 함께 있는, 남종영이라는 후배 기자였다. 목소리가 다급했다. 그는 주주총회장인 백범 기념관에 있다고 했다. 어느 주주총회장인고 하니, 바로 한겨레신문사의 주주총회장이었다. “식순에 맹세가 있다니까요.” 맹세라 하면… 주주에 대한 맹세? 앞으로 주식 배당해주겠다고? 아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다. 국기에 대고 신문 잘 만들겠다고 맹세하나? 남 기자는 주총 진행요원으로 동원됐다가 상황을 알아차리고 편집장에게 전화를 건 거였다. “문제제기해서 못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순간 머리가 복잡했다. 주총 책임자에게 전화라도 걸어?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맹세는 하지 않고 국기에 대한 경례만 하기로 절충을 봤어요.”
여기엔 사연이 있다. <한겨레21>은 그해 1월에 ‘국기 애국주의’의 폐해를 대형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정부도 모르던 68년 국기 맹세문의 초안자인 전 충남교육청 장학계장 유종선(86)씨를 찾아냈다. ‘정의와 진실’이라는 문구가 담겨 있던 애초의 맹세문이 박정희 시대에 어떻게 변질되고 악용됐는지 처음으로 밝혀냈다. 국기 경례를 거부하던 이들의 짓밟힌 인생 스토리도 알렸다. 그 특종의 주인공이 바로 남종영 기자였다. 자신이 글을 쓴 지 한달밖에 안 됐는데, 그것도 한겨레신문사 주총장에 버젓이 맹세문이 울려퍼진다고 생각하니 난감했던 거다.
거기엔 나도 얽혀 있다. 나 역시 그때로부터 8개월 전 한겨레신문사의 주주·사원 체육대회 개막행사에 참가했다가 장엄한 주악의 맹세문 낭독에 놀랐기 때문이다. 평소엔 별로 문제의식이 없었는데 그날은 왠지 확 깨는 느낌을 받았다. 체육대회장에서 무슨 얼어죽을 국가 충성 맹세란 말이냐. 진보적이라는 한겨레조차 이런 데 다른 곳은 오죽하랴. 그러면서 ‘필’이 꽂혔다. 이거 한번 크게 기획해봐야겠다고. 결국 ‘강추 아이템’으로 밀어붙여 커버스토리로까지 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가 회사 주주총회장에서 또 되풀이될 뻔하다니.
주총 사건 뒤, 더 독하게 국민의례에 대해 뽕을 빼기로 마음먹었다. 틈만 나면 오만 가지 기사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물고 늘어졌다. 남종영 기자가 ‘저격수’로 나섰다. 목표는 ‘국기의식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였다. 그 보도 덕분으로만 치부할 순 없겠으나, 긍정적 변화의 싹이 텄다. 올해 1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삭제한 국기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행정자치부가 ‘국기법 시행령’을 통해 문안 내용을 살짝 바꿔 맹세문을 존치하려 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102명의 청소년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80여개 시민단체도 여기에 힘을 모아주었다는 소식이다. 요즘엔 여러 언론에서 너도나도 ‘국기 맹세 비판’에 열중인 모습도 본다.
그러던 와중에 올해 초 허탈한 상황을 또 접했다. 1월29일 <한겨레>는 기자들의 윤리적 보도를 다짐하는 ‘취재보도준칙’을 발표했다. 편집국 사무실에서 발표회도 열었는데, 그 다음날 신문에 난 관련 사진을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취재보도준칙 발표회 단상의 인사들이 모두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 자리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하필 그 장면을 촬영해 ‘취재보도준칙’의 대표사진으로 대문짝만하게 싣다니! 내부 매체를 통해 입이 닳도록 국기의식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한껏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만큼 국기에 대한 경례가 습관이 돼 있고 거기에 무감각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다.
칼 마르크스는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라고 말했다. 차라리 “국가는 동사무소다”라는 정의가 더 멋지다. 아니면 “국가는 파출소다”. 공동체의 안전과 복지와 행정을 책임지는 동사무소와 파출소가 확대되면 국가가 된다. 따라서 국가가 시민을 향해 충성을 다짐해야 하는 세상이다. 시민들은 국가에 ‘충성’이 아닌 ‘협조’만 하면 된다. 그것도 하는 거 봐서!
며칠 전 영화 <트랜스포머>를 보았다. 열살짜리 아들의 ‘지도’를 받으며 관람했다. 비주얼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현란했다. 내용은? ‘아동스러움’의 절정이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러 나가자고? 이해는 하지만, 그 대목부터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두 시간만 참으면 된다. 수십년간 중단되지 않는 영화 같은 현실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국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국가에 고분고분할 때, 국가는 ‘트랜스포머’처럼 자유자재로 변형될 수 있다고. 지금은 천사인 척하지만 언제 전쟁을 탐내는 괴물로 변신할지 모른다. 멋대로 이름을 지어본다면 트랜스네이션! 아직도 충성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은 ‘유치찬란 트랜스네이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