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B기자다. 얼마 전 김민경 기자가 오픈칼럼에서 “내공있는 중견 여배우에 특별한 선호를 지닌 B선배는 ‘안경이 터져나갈 것 같은’ 풍성한 반달 눈웃음을 짓는다”라고 썼던 그 B 말이다. 안경이 터져나갈 듯 웃음을 짓는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부끄러운 건 없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중년 여배우들에 대한 애정은 꽤 깊다. 꼭 여배우일 필요도 없다. 중년 여성들과 친하게 지낸 건 이미 어렸을 때부터였으니까. 중학생 때는 같은 빌라에 사는 아줌마들과 매일 배드민턴을 쳤고, 군대에서는 교회에서 밥 차려주던 작전장교 사모랑 친했고, 재수할 때는 독서실 총무아줌마랑 그녀의 아들의 진로를 놓고 고민해주기도 했다. 작은어머니들과 수다도 잘 떤다. 시집 간 여성동지들도 나한테 남편 흉을 본다. 왜들 이러시는지 정말….
하지만 아가씨보다 아줌마들과 친하게 지내는 내 모습이 싫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은 내 또래 아가씨들 보다 훨씬 재밌고 즐거운 대화를 하기에 좋은 친구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말의 자유가 있다. 내숭을 떨며 말을 가리는 법도 없고, 살아온 세월만큼 레퍼토리도 다양하고 구사하는 단어들 역시 거침이 없다. 자신이 먼저 배려받아야 한다는 고집보다는 상대를 먼저 챙겨주려는 의도로 가득하며 그들 앞에 앉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따지지도 않는다. 돈이 있든 없든, 잘생기든 말든 경청하려는 자세와 친근한 웃음만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씨네21>에 입사한 뒤 중년 여배우들과의 인터뷰를 선호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첫 인터뷰 상대였던 <이어도>의 이화시 선생님은 처음 맡은 일거리에 긴장한 기자의 마음을 녹이며 인터뷰를 만남으로 승화하셨다. 선생님은 인터뷰 도중에도 내가 몇살인지, 하는 일이 힘들지는 않은지 등을 물으셨고 급기야는 이제 장가가서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지 않냐는 말을 비롯해 “얼굴 예쁜 여자는 막상 이야기할 때는 새침떨기나 하지 매력없다”며 좋은 사람 만나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셨다. 실제 나와 동갑인 딸을 가진 그분께는 내가 기자가 아닌 아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후에 만난 모든 중년 여배우들이 모두 그분 같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옆자리에 동석한 마케터와 매니저들의 눈치를 살피는 젊은 배우들과는 달리 오히려 그들은 마케터와 매니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거나 함께 웃게 하며 대화했다. 시스템 안에서 조금은 벗어난 탓에 겪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 덕분에 그들에게도 역시 말의 자유가 허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CF나 영화에서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였던 젊은 배우들을 막상 만났을 때 적잖은 실망을 주는 경우는 이미지와는 다른 행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을 가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 것도 있다. 뿐만 아니라 “좋았죠”, “재밌었죠”, “감사해요”의 틀이 주어진 그들과의 인터뷰에는 전략이 필수적이다. 때로는 억지로 웃어주기도 해야 하고, 매니저의 표정을 살펴야 하고, 인터뷰 뒤 “그 말은 빼달라”는 요구와도 맞서야 한다. 그에 비하면 중년 배우들과의 인터뷰는 어찌나 편안하고 즐거운지. L선배는 회의시간마다 “안경 터지겠다”며 놀리고 동기인 J기자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지만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더 많은 중년 여배우들을 만나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젊은 미녀 배우와의 인터뷰를 사양하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