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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배우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상투 틀고 교통정리
이영진 2007-07-19

5·16군사정변 이후 재건국민운동 나팔수로 동원된 배우들

한,미 합동 교통정리 경기대회에서 인기 희극배우 김희갑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1961년 10월14일)

“황파에 시달리는 삼천만 우리동포/ 언제나 구름 개이고 태양이 빛나리/ 천추에 한이 되는 조국질서 못 잡으면/ 내 민족 앞서 선혈 바쳐 충혈원혼 되겠노라.” 1961년 5월 박정희 소장이 자형에게 보낸 시의 전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61년 5월16일 0시15분. “목숨 걸기를” 밥 먹기보다 “즐겨했다”는 박정희 소장 일행은 서울 제6관구 사령부에 쿠데타 지휘소를 차렸고, 이튿날 오전 9시 군사혁명위원회는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피를 토해 부른 4월의 함성을 메아리로 되받지 못하고 허공에 날려버린 장면 정부는 “뜻있는” 군인들의 무혈혁명 앞에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짧았던 ‘승리의 화요일’이 가고, 끝모를 ‘겨울공화국’이 찾아들었다.

헌법을 워커로 짓뭉개버린 군인들은 맨 먼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었다. 이 초법적 통치기구 아래서 같은 해 6월11일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이 공포됐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반공과 내핍, 근면정신 고취, 생산 및 건설 의식 증진, 도덕적 앙양, 정서 순화, 국민 체위 향상을 과제로 내걸었다”. 쿠데타 이후 서울시청 입구에는 “마지막 혁명이다 함께 뭉쳐 건설이다”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나붙었다. 재건은 청산을, 청산은 개조를 뜻했다. 박정희의 재건은 ‘인간개조’ 없이는 불가능했다. 새로운 혁명은 자유에 혼란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이전까지 허용되던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커피를 마시고 외식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고, 폐지수집이라는 이유로 모든 공문서가 재활용 대상이 됐다.

개조를 위해선 본보기가 필요했고, 나팔수가 필요했다. 거지들은 국토건설사업 노동자로 불려갔고, 깡패들은 ‘차카게 살자’라고 외치며 거리행진을 해야 했다. 영화인들도 개조 대상에서 빠질 수 없었다. 특히 “밀수와 사치가 몸에 밴” 배우들은 집중 관리 대상이 됐다. 1961년 6월25일, 국가재건 국민운동 서울지부는 한국디자이너협회, 한국배우협회 등과 함께 동대문, 종로 등에서 신생활복 행진을 벌였다.

이빈화, 김혜정, 이향자, 김아미, 양미희, 김의향, 남미리, 손미희자, 김옥경, 최지희 등 10명의 배우들은 작업복 차림을 하고 A, B조로 각각 나뉘어 화물을 실어나르는 유개차, 무개화차에 올라탄 뒤 정신무장을 부르짖었다. 요상망측한 광경을 놓칠세라 서울 시민들은 아침부터 거리에 나섰다.

개조는 단박에 이뤄질 수 없다. ‘재건복’이라 통칭한 신생활 간소복 ‘휏쑌쇼’는 끊임없이 열렸고 그때마다 여배우들은 호출됐다. 상상해보라.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이 무대에 올라 신생활운동으로 새나라, 새마을 재건을 역설한다. 일장 연설이 끝나면 군악대의 행진곡 반주가 흘러나오고, 곧이어 몇종의 재건복을 입은 여배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고무신 신고, 빗자루 들고, 머리에 수건 두른 여배우들의 런웨이라. 가케모치 뛰기 바쁜 배우들이었지만, 군부의 지령을 거절할 순 없었다. “교통도덕심 함양”을 위한 교통정리 경기대회에도 김지미, 윤일봉, 김희갑 등의 배우들은 일일 경찰관으로 불려나갔다. 시내 한복판에서 상투 틀고 족두리 올리고 교통정리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회성 이벤트로 그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어쨌든 가난과 게으름, 무기력과 한탄, 무질서와 혼란, 사치와 방탕은 병영국가 건설을 위한 인간개조를 가로막는 원흉이었다. 오발탄은 용서되지 않았다. 쏘아올린 대로 적중해야 했다.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 4·19와 함께 민간 심의기관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발족됐지만, 그 생명은 짧디 짧았다. 개봉 당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상이군인들의 처절한 생활과 어두운 빈곤이 너무 강조되어 있다”는 등의 이유로 군사정부 들어선 뒤 재개봉이 금지됐다. 영화평론가 고 이영일의 지적처럼 “어두워서 가위질, 키스를 해서 가위질, 너무 울어서 가위질, 네오리얼리즘은 사회주의니까 금영(禁映)”이라는 검열제국은 1년3개월 만에 선글라스 낀 군인들의 ‘빽으로’ 부활했고, 겨울공화국에서는 ‘잘살아보세’라는 찬가만을 불러야 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한국영화전사>(이영일, 도서출판 삼인),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5권>(국정홍보처), <서울, 20세기-100년의 사진기록>(서울시정개발원, 서울학연구소), <만인보>(고은, 창비), <우리생활 100년-옷>(고부자, 현암사),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한국영상자료원 엮음),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