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준 감독의 <우리학교>에는 눈물이 또르르 흐르는 명대사가 넘쳐난다. 어두운 극장에서 적어 정확하지도 않고, 앞뒤 맥락도 없지만 옮겨본다. “(분단선의 코스모스야, 남북을 오가는 바람에) 설레고 싶어서 피어났느냐”, “(북한을 방문한 학생들, 해질녘에) 여기 태양을 찍어주세요”, “(이제까지는) 심장 속에서 한 말이 아니었어요”, “가슴에서 우러난”. 이 흔한 표현이 서툴지만 절실한 “심장 속에서 하는 말”이 되었다. 특히 나를 무장해제시킨 대사는 “어떻게 아느냐, 너는…(말하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을)”였다. 조선말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를 위해 반장이 편입생과는 일본어로 대화해도 감점이 없도록 제안하자, 감동한 학생이 한 말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면, 그 사람을 믿고 사랑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 확신은 언제 오는가. <미션>에서 야비한 노예사냥꾼 로버트 드 니로는 질투와 결투로 동생을 죽인다. 사람들은 잔인무도한 그가 죄의식에 고통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는 6개월간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를 유폐한다. 자기 성(城)에 갇힌 그를 찾아온 신부 제레미 아이언스의 한마디에, 그는 신부를 따라나서고 원주민과 더불어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신부가 그에게 한 말은, “당신은 동생을 사랑했군요”. 가장 듣고 싶은 말, 가장 이해받고 싶은 심정을 알아준 사람을 따르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내 마음 깊고 깊은 토굴에 닿은 사람에게, 우리는 목숨이라도 바친다.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는 “타인이 네게 해주길 원하는 대로 타인에게 행하라”는 황금률은, 호혜가 아니라 공감의 규칙이라고 통찰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낄지 생각하라는 것. 내가 갑을 주면 너는 을로 보답해야 한다는 호혜에 근거한 계약 관계가 지금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시장과 정치의 법칙이다. 하지만 사랑을 포함한 모든 거래에서 계약 당사자는 자기가 주고받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고, 또 계약이 정의롭게 작동하면 좋겠지만 우리가 겪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개의 계약은 참여자의 계급, 성별, 나이, 인종 등 사회적 조건의 차이로 인해 불공정하며, 마음이나 감정처럼 읽기도 어렵고 변화가 심해 믿기 어려운 것을 교환할 때 계약 법칙은 더욱 복잡해진다.
누구나 타인의 이해와 수용을 원한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 헤맨다. 소통을 위해 각자의 섬에서 벗어나려는 그 많은 ‘외국어’들, 줄기차게 울려대는 휴대폰, 메신저…. 하다하다 안 되면 울부짖고, 자살하고, 관계를 포기한다.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문맥 안에서만 그렇다. 죄수의 딜레마, 치킨 게임, 최후통첩 게임 등 갖가지 게임의 법칙은 인간을 끝까지 믿지 않는 자가 강한 자이며, 강한 자가 승리한다고 가르친다. “한길 물속은 알아도 열길 사람 속은 모른다”, “(언제 나를 덮칠지 모르는 매복자가 있다는 듯) 타인의 마음은 깊은 숲속”… 때문에 우리는 살기 위해 ‘짱구를 굴리고’, 포커 페이스로 상대의 마음을 훔치거나 속여야 한다. 인생이 말할 수 없이 피곤하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남자는 계급에 따라 룸살롱에 가거나 좀더 싼 섹스를 구매(실은, 타인의 감정 노동을 구매)하고, 여자는 정신과 의사에게 가거나 ‘동양철학관’을 찾는다. 여성은 돈을 내고 나와 타인의 본심을 알려달라고 애원하며, 남성은 그마저도 귀찮아 그냥 논다. 노는 것도 혼자 못해서, 돈 주고 여자더러 같이 놀아달라는 것이 ‘향락’ 아닌가.
언어가 다르고 사회적 위치가 달라서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음이 없으면 대화는 소통이 아니라 피로한 게임이 된다. 마음이 가난하면 불신과 피해의식에 에너지를 쏟느라 쿨한 계약조차 제대로 성사되지 않는다. 계약 주체로서 고정되고 완결된 내 몸의 경계(境界, 警戒)를 넘으면, 타인의 심정에 가까이 닿을 수 있다. 독심술이 상대를 나의 의도로 환원하는 둘이 합해도 하나에 미달하는 마이너스 기술이라면, 공감은 타인의 마음을 얻어 나도 상대도 확장되는 성장이다. “어떻게 아느냐, 너는” 이만한 사랑 고백, 삶의 열락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