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서 태어난 유래명시형
어쩌면 가장 평범한 형태의 명칭일 듯. 모기업 등 영화사의 모태가 되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한 형태를 말한다. CJ엔터테인먼트, CGV, 롯데엔터테인먼트, 롯데시네마 등이 대표적인 예. 롯데엔터테인먼트, 롯데시네마는 말할 것도 없이 롯데그룹의 일부임을 명시한 명칭인 반면, CJ엔터테인먼트는 CJ그룹의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제일제당(Cheil Jedang)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그렇다면 CGV는 어떻게 만들어진 이름일까. 한국의 제일제당(CJ), 홍콩의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 호주의 빌리지로드쇼(Village Roadshow), 3사가 합작한 형태로 탄생한 CGV는 씨제이 골든빌리지의 이니셜을 의미한다. 1999년 제일빌리지라는 명칭으로 설립돼 투자사와 주주가 변경되는 등 변화를 겪으면서 1999년 씨제이빌리지, 2001년 CGV로 바뀌었다가 2002년 CJ CGV로 굳어진다. MK픽처스 또한 영화사의 합병으로 탄생한 이름이다. 2005년 MK버팔로의 영화제작 브랜드였던 강제규&명필름이 MK픽처스라는 새 이름을 얻은 것. 강제규필름, 명필름의 이니셜을 살리는 동시에 MK버팔로와의 연관성을 놓지 않기 위해 MK라는 명칭은 고스란히 받아 안았다. 한편 유래명시형에는 특정 영화의 명칭을 고스란히 옮긴 영화사도 포함된다. 예컨대 두사부필름은 <두사부일체>로 데뷔한 윤제균 감독이 <색즉시공>을 준비하면서 꾸린 제작사. 크게 흥행한 데뷔작에 대한 윤제균 감독의 애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영화의 모든 것이 되라, 선전포고형
선언하듯 미래에 대한 포부를 앞세운 명칭이다. 싸이더스FNH와 그 전신인 우노필름, 시네마서비스, 메가박스, 청어람, 백두대간, 올댓시네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차승재 대표가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싸이더스와 우노는 모두 라틴어에서 비롯된 명칭. 싸이더스(sidus)는 별, 운명, 천국, 영광을, 우노(uno)는 1을 의미한다니, 별처럼 반짝이는 영화사 혹은 1이라는 숫자처럼 앞서나가는 영화사를 꿈꾸지 않았나 추측된다. 반면 시네마서비스라는 이름은 당시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동차수리업체 현대자동차써비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강우석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사 이름도 관객에게 서비스한다는 의미로 ‘시네마서비스’라고 지었다”고 설명해 서비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또 다른 이유를 짐작게 했다.
한결 직접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는 명칭도 있다. 메가박스, 청어람, 백두대간, 올댓시네마 등이 그것이다. 메가플렉스에서 메가를, 박스오피스에서 박스를 각각 끄집어낸 메가박스는 멀티플렉스 체인의 거대한 덩치는 물론 시장에서 되도록 많은 파이를 차지하고 싶다는 암묵적인 욕심을 드러낸다. 오리온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인 쇼박스는 문자 그대로 보여준다는 의미의 쇼에 박스오피스의 박스를 붙인 형태. 영화산업의 특성을 드러내는 한편 메가박스와의 연결고리 역시 잊지 않은 명칭이다.
이에 반해 청어람과 백두대간은 특히 한글로 이뤄진 명칭이기에 의미있다.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무엇보다 한글 이름으로 만들고 싶었다”면서 “한글 이름을 짓는 게 참 어렵다. 일반 기업체 법인에도 많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영어식 이름을 피하는 것이 우선순위”였다지만, <순자>의 구절인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濫 靑於籃)을 인용한 이 명칭에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취지가 분명히 느껴진다. 지금이야 영화사로도, 단어 그 자체로도 익숙한 백두대간은 영화사가 설립된 12년 전에는 거의 쓰이지 않은 이름이라 웃지 못할 오해를 많이 샀다. “거기 백척간두죠?”라고 묻는 전화는 물론 “백두대갈 아니냐”는 놀림까지 받았을 정도. 초기에는 직원들이 회사를 소개하는 책자를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회사 명칭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백두대간 대표 이광모 감독은 “원래 반대가 하도 심해서 안 쓰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면서 “한국 영화산업에 통뼈가 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는 작명의 변을 농담처럼 남겼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연결되는 산줄기를 의미하는 말.
한편 밥 포시의 <올 댓 재즈>를 변형한 듯한 올댓시네마는 오히려 의미에 치중해 고른 것이라고. “옛날 느낌이 안 났으면 좋겠다”는 채윤희 대표의 소망에 “영화의 모든 것이 되라”는 뜻을 덧붙여 완성한 이름이다. 채윤희 대표의 남편이 작명했다.
이름에서 소리가 나요, 분위기중심형
뉘앙스를 부각시킨 명칭들이다. 압축된 뜻보다는 각 명칭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주가 되고 따라서 한 글자로 이뤄진 이름이 대다수다. 먼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당장 떠올리게 할 만큼 동화적인 명칭인 마술피리는 “귀엽고 친근감 있고 판타지한 느낌”을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오기민 대표는 “영화는 기본적으로 판타지한 것이니까. 그것과도 연결된다”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거창한 이름은 싫었다. 큰 뜻을 암시하지 않으려 했다.” 한글 작명이 거의 없던 시절 과감하게 한글 이름을 내걸었던 영화사 봄은 어쩌면 오정완 이사의 취향과 결단 때문에 가능했던 이름이다. 처음부터 반드시 한글이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시작했고 운율을 살리기 위해 원래는 봄 영화사여야 할 것을 영화사 봄으로 도치했다. 지금은 영화사 집, 영화사 아침, 영화사 숲, 영화사 진진, 영화사 하늘, 영화사 비단길, 영화사 반짝반짝 등 적지 않지만 당시에는 흔치 않은 사례였다. 오정완 이사는 “봄이라는 단어가 예쁘기도 하지만 본다는 것의 명사형도 된다”며 “영어로 표기할 때도 Spring이 아니라 Bom이라고 명시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뽕 영화사, 봉 영화사라고 만날 놀리고 그랬다. 반대도 많았지만 늘 그렇듯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게 제일 좋다.” 반면 모호필름은 오해가 잦은 쪽이다. 이영준 실장은 “항간에 세 가지 소문이 떠도는 것”으로 알지만 “모두 사실 무근”이라고 설명했다. “말 그대로 성격이 모호한 영화를 지향하는 회사가 아니냐는 소문. 절대 사실과 다르다. 모던 호러 아니냐는 소문이나 모던 호미사이드(homicide) 아니냐는 소문도 그렇다.” 영어로 MOHO라고 쓰는 모호는 실상 Modern Humanist Organization의 줄임말이다. 현대 휴머니스트 조직이라는 해석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니, 그야말로 뉘앙스로 파악해야 할 이름일 듯. 박찬욱 감독은 “우리가 투자사들이 싫어할 만한 이름을 지을 리가 없지 않나”며 농담처럼 덧붙였다고. 문근영이 직접 지었다는 나무엑터스 역시 나무라는 사물의 이미지가 주요하게 작용하는 명칭이다. 김종도 대표는 “한곳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무성한 잎을 내서 커다란 그늘에서 쉬어가면서, 또 열매를 맺자”는 뜻이라며 명칭의 풀이와 회사의 기업이념을 동시에 내놓았다.
사장과 회사는 하나다?, 대표인식형
고전적인 형태의 명칭. 대표 이름을 앞세운 영화사들이다. 김기덕, 심보경, 정태원의 이름을 이은 김기덕필름, 보경사, 태원엔터테인먼트 등과 이승재와 그의 부인 이름에서 이니셜을 딴 LJ필름이 포함된다. 성명 전체를 완전하게 인용한 명칭이 있는가 하면 이니셜이나 이름의 일부를 사용한 명칭도 있다. 특히 LJ필름의 LJ에는 빛과 즐거움(Light & Joy)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한편 필름, 엔터테인먼트 등의 단어가 으레 뒤따르는 다른 이름들에 비해 보경사는 조금 색달라 보인다. 어떻게 보면 금은방이나 양복집 같고 어떻게 보면 절 이름 같기도 한 묘한 명칭이다. 심보경 대표는 “여러 가지로 보경사라는 이름은 흔하다”고 설명했다. “콘텐츠 중심의 영화 제작사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무슨무슨 엔터테인먼트나 필름, 픽처스 같은 것은 지워보자는 생각이었다.” 복덕방이든 양장점이든 이 업종 저 업종 가리지 않고 즐겨 쓰이는 보경사라는 상호명처럼 애초 소박한 의미를 지향했다고. 비록 사람 이름을 턱하니 내걸었기에 주변에선 “너무 거만한 것 아니냐, 너무 자만한 것 아니냐”고 성토(?)하긴 한다지만. 보배 보(寶)자와 경사 경(慶)자로 이뤄진 경사 속의 보배라는 이름 자체의 의미도 영화쪽과 결코 멀지 않다는 주장이다. 기실 영화라는 사업은 박스오피스, 흥행 따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아이디어 제공자는 MK픽처스 이은 대표. 스치듯 툭 내던진 “보경사 어때?”라는 제안이 무수한 반대 의견을 뚫고 채택된 경우라고.
유머와 재치가 빛나는 아이디어승부형
근래 생긴 많은 영화사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중의법을 가미하는가 하면 유머 감각도 발휘해 한층 기억하기 쉬운데다 숨은 뜻까지 알차니, 그야말로 21세기형 브랜드네이밍인 셈. 가장 먼저 신씨네. 신철 대표의 이름을 연상시킬뿐더러 ㅅ이 반복돼 단정하고 포근해 보이는 이 명칭은 씨네2000 이춘연 대표가 지은 것이다. 신씨의 집이라는 뜻과 신(new) 씨네(cine), 즉 새로운 영화라는 뜻을 동시에 지녔다고. 당시 대부분의 영화사들이 무슨무슨 영화사라는 형식을 주로 취했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 상당히 감각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신철 대표 역시 “황기성사단이라는 곳이 예외적으로 있긴 했지만 20여개 영화사들이 거의 다 그랬다. 이것저것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특별히 후보로 삼았던 명칭은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고 평했다.
반면 필름있수다는 장진 감독이 속해 있던 문화창작집단 수다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운을 맞추려다 엉겹결에 탄생한 것치고는 충분히 완결성있는 작명이다. 그렇다면 수다는 애초에 누가 붙인 명칭일까. 장진 감독은 “내가 지었다. 재미있지 않나”며 작명의 이유를 설명했다. “어감도 좋고 사실 여기 모인 인간들 어휴, 어찌나 수다스러운지…. (웃음)” 이은하 PD 역시 “대학 동아리처럼 아는 사람 대여섯이 모여 수다 떨듯 편하게 아이디어를 모으고 이를 창작하는 모임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보면 대사발이 사는 장진 감독의 영화와도 그럴듯하게 어울리고 구성원들의 특성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불현듯 나온 것 같다”고는 하지만 의미나 재치만큼은 다른 작명에 뒤지지 않는 듯.
마지막으로 보통명사임에도 생각보다 다양한 뜻을 지닌 이름이 있다. 공포영화 전문 프로덕션 토일렛픽처스가 내세운 토일렛이라는 단어다. 안병기 감독은 장난스럽게 세 가지 의미를 늘어놨다. “첫 번째 화장실이라는 장소 자체다. 내가 여태껏 공포영화를 많이 하지 않았나. 우리나라에서 공포물의 배경으로 주로 쓰이는 곳이 화장실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공포스럽게 여기는 장소 역시 화장실, 화장실 천장 등이다. 두 번째 화장실이라는 공간의 보편성이다. 내가 워낙 꿈이 커서 전세계에 우리 회사의 지사를 둘까 생각했다. 해외에서 인터뷰할 때도 토일렛을 가리키며 ‘여기가 우리 사무실이다’ 하기도 했고. 세 번째 어렸을 때 내 별명이 변기였다. (웃음) 옛날에는 강제규필름, 강우석필름, 이렇게 감독 이름을 가지고 영화사를 차렸지만 그건 너무 낯뜨거워서….” 회사 간판에 새겨진 ‘토일렛 since 2001’이라는 문구를 보고 가끔씩 스님들이 내려와 “화장실이 왜 여기 있냐”고 물어보거나 “변기 파는 회사냐”는 문의하는 해프닝도 종종 발생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