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 “<익사일> 같은 영화를 보면 ‘액션을 더이상 뭘 새롭게 찍겠어?’라는 오만방자함이 박살나요.” 이동진 “오래된 클래식 액션영화의 묘한 인상이 있어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이크! 스타일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이크! 스타일님의 말(이하 이크) : 죄송, 이제야 막 들어왔어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님(이하 시체) : 으악, 놀래라! 망했다. 이번주 개봉작에 실려나온 시체 숫자 세고 있었는데, 부르시는 바람에 어디까지 셌는지 까먹었잖아요. T-T
이크: 진짜 많이 죽는 장르는 사실 공포가 아니라 액션이죠. <람보2> 같은.
아무: 끙, 그렇죠. 하지만 그 경우는 죽음보다 파괴에 가깝게 느껴지니까요.
이크: 대량사상이라면 재난영화도 있네요. <딥 임팩트>가 최다사상자 영화인가요? 참, <지구를 지켜라!>도 있네요. ^^
이크: 아, 거의 피바다네요. -..-
아무: 두 영화 제목을 붙여 번역하면 ‘전락과 추방’? ‘하강과 망명’? 이거 무슨 스탕달 소설 제목 같지 않아요? ^^ 먼저 두기봉 감독의 <익사일>은, 숭고한 폼의 향연이었어요. 과거 조직 두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아화를 네명의 친구가 찾아오면서 활극이 시작되죠. 두명은 보스의 명으로 제거하기 위해, 두명은 그것을 막기 위해.
이크: 거의 증류되어 불순물이 없는 액션영화였습니다.
아무: 극도로 순수해서 숭고한 장르영화랄까요. 폼재기에 대해 말하자면, 남자들끼리 뭐든 던지면 서로 놓치는 법이 없어요. 라이터, 총, 열쇠, 술이 든 위스키 병까지도. 심하죠. +_+ 또, 금괴 수송차량 경호 경찰은 우연히도 하모니카를 갖고 다닌다죠.
이크: 뭐, 이 영화는 그렇게 보면 정말 황당무비유치찬란초절정슈퍼울트라 B급 무비죠. 액션장면들은 진짜 대단하긴 하더라고요.
아무: 특히 총격전 뒤 아화와 보스가 우연히 같이 실려온 무면허 의사의 수술실에서 벌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두고두고 기억날 탁월한 장면이었습니다.
이크: 두기봉 감독, 향후 몇년간은 총격장면 안 찍어도 배부르겠더라고요.
아무: 항상 “액션을 더이상 뭘 새롭게 찍겠어?” 내심 심드렁하다가도 <익사일> 같은 영화에 그런 오만방자함이 박살나요. 통상 “액션은 볼 만하다”라는 리뷰를 받는 <트랜스포머>류의 영화들은 사실 액션보다 액션의 파편만 보 이잖아요.
이크: 수술실과 마지막 액션 시퀀스는 정말 명장면입니다. 좁은 실내 공간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을 어쩜 그리 잘 찍으시는지. 예전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에서 엘리베이터 안의 총격장면 보고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 영화의 실내 총격도 대단하더군요.
아무: 그러고 보니 인물들의 여정도 <소나티네>와 조금 비슷한걸요? 초반부터 주인공들을 횡으로 대범하게 연결하며 움직이는 카메라가 고전 사무라이 영화를 보는 듯했어요. 그리고 총상을 입을 때 피어 오르는 먼지 같은 피보라 보셨어요?
이크: 포말로 부서지는 피였죠, 기왕이면 보라색으로 표현하시지…^_^ 그러면 인상적일 것 같지 않아요? 빈티지 블러드라고나 할까.
아무: 전 그냥 “어머 드라큘라였어?” 혹은 “혈관계 질환이?” 이럴 것 같은데.
이크: 그런데 전 두기봉이란 이름을 보면 묘한 느낌이 들어요. -.- 중학생 때 학교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애 이름이 기봉이였거든요.
아무: 혹시 그분, 맨발로 다니셨나요? ^^;
이크: 덕분에 그 이름을 들으면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인물이 연상된다는. 그런데 <맨발의 기봉이>가 나오고 나서 완전히 이상해진 거죠. 영화가 개봉하면서 실제 기봉씨와 신현준씨가 만난 적이 있는데 자꾸 그 만남을 보도한 기사 제목이 떠오르는 거예요. “두 기봉, 청와대에서 만나다.” -_- 짱 기봉이와 맨발의 기봉이 사이에서 두기봉 감독이 있는 건데 이거 참, 이미지 정리 안 돼요. - -;
아무: 뇌에 부담이 크시겠군요. 선배를 위해 늘 기도할게요. -..-
이크: (감사) 그나저나, 홍콩 장르영화의 미래는 두기봉이 짊어진 듯.
아무: 액션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아무 이유없이 드리운) 천들을 엄폐물로 사용하는 기교가 흥미로웠어요. 영화 최초의 액션은 아화를 제거하러 간 두 남자와 보호하러 간 두 남자가 아화의 아내와 아기 앞에서 난장판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인데요. 날리는 천이 마치 여자와 아기의 공간을 구획짓고 그들의 시야를 가리는 것처럼 보였어요. “여긴 당신들 세계가 아니야”라고 하듯. 그 장면 안에 아내와 아기가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어색하잖아요. 장르가 여 자와 아이를 추방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크: 어색한 것 많죠. 하드보일드적 클리셰들도 정말 많았어요. 이를테면, 창녀가 그 총격전의 와중에서 돈과 금을 두번씩 챙기는 장면은 확 깨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아무: 전 TV드라마나 장르영화에서 간단한 커뮤니케이션으로 해결될 문제가 굳이 대화하지 않아서 비극으로 비화되는 설정을 불편해하는 편인데요. <익사일>에서도 아화의 아내와 친구들이 대화를 하지 않는 바람에 오해가 초 래되고 종막의 불씨를 남기는 구성이 갑갑했어요. 경솔한 여자 탓에 훌륭한 남자들이 떼지어 피해를 본다는 식이니까.
이크: 무성영화 같은 측면도 있죠? 일단 대사도 두줄이 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인물들의 움직임도 마임 같거나 무성영화 액션 스타 같은 부분이 있더라고요. 전반적으로 오래된 클래식 액션영화의 묘한 인상이 있어요.
아무: 장르 컨벤션과 아이콘적 이미지가 대사를 대신한다는 점에선 동의해요. 음악과 액션이 맞는 합도 그렇고요. 유위강, 맥조휘 영화에 비한다면 훨씬 장르의 로망에 깊이 젖어 있어 도리어 호금전, 세르지오 레오네 영화에 가 깝다고 느꼈습니다.
이크: 하지만 음악은 베스트는 아니었어요. 예컨대 두기봉 감독 전작 <미션>의 쇼핑센터 총격전은 음악과 액션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거든요. 그에 비하면 이 영화의 음악이 최적이었다는 판단은 들지 않았어요.
아무: 저는 좋았는걸요. 액션과 음악이 딱 맞는 게 아니라 음악이 하나의 층을 영화에 더해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운드가 세심해요. 갓난아기 발목에 달린 방울소리가 풍경소리로 이어지고, 냄비가 끓는 소리,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가 그리는 음향의 풍경이 좋았습니다.
이크: <익사일>의 사운드는 좀 과한 느낌이 있죠.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닌 것이 영화 자체가 스타일 과잉으로 만든 영화니까요. 사실 이런 액션 하드보일드 영화에서 아까 말씀드린 창녀의 행동이나 아기 울음소리는 클리셰죠.
아무: 클리셰라고 무조건 결함은 아니죠. 이 영화가 처한 지평에서는 조화를 이루잖아요. 사실 사내들이 총질하다 말고 힘 모아 아화의 이삿짐을 나르는 황당한 도입부부터 “지 알고 내 알고” 식 장르 관습을 아예 내러티브 뼈대로 끌고 온다고 생각했어요.
이크: 영화 자체가 클리셰 덩어린데요, 뭘. <익사일>의 사운드가 이 영화에 어울린다는 점에는 동의해요. 저는 이 영화가 시작하는 방식이 좋아요. 두번의 노크로 시작하는데 영화 자체가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영화 같았어요. 영 화에 통틀어 네번의 노크가 나오는데 뒤로 갈수록 거칠어지죠. 그리고 두 번째 노크 직후에 공중에서 방문자들을 내려다보는 직부감 숏은 멋지던걸요.
아무: 음, 배우들이 정수리 탈모가 없었기에 가능한 앵글이죠. ^.~
이크: 하하. 배우 적룡이 들으면 기분 나빠하실라. ^^ 그 밖에 액션장면을 연출할 때 창문을 프레임처럼 자주 활용하는 게 인상적이더라고요.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액션장면 같기도 하고요.
아무: 창은 프레임이기도 하지만, 수술실 시퀀스에서 보듯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며 감정을 고양시키는 장치도 됐어요. 마치 전투에서 골짜기에 몰아넣어져 무참히 참살되는 아군 병사를 손 못 쓰고 지켜보는 전우의 감정을, 창을 이용해 연출하더군요.
이크: 내부 액션이 내부-외부의 액션으로 확장되는 점이 멋졌습니다. 위아래 층에서 서로 총을 쏘아 액션에 공간적 깊이를 부여하는 것도 두기봉 감독이 즐기는 방식 같아요. 마지막에 음료수 캔 하나를 발로 차올리고 나서 그것 이 떨어지는 순간 액션이 끝나는 장면도 멋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직전에 친구들이 갑자기 즉석 사진을 찍는 장면은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요. 너무 심하잖아요.
아무: 오래된 클리셰죠. 무슨 일을 당할 단체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가는 영화야 많잖아요. <알포인트> <공동경비구역 JSA> 등등.
이크: <익사일>의 경우 클리셰라기보단 제겐 날로 먹으려는 엔딩처럼 보였어요. --; 행복했던 한때의 사진으로 끝나는 영화야 진짜 많죠. <태풍>도 그랬고요
아무: 그래서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는 격언이 생겼나요? -.-
이크: 그나저나 두기봉 감독 참 신기하긴 해요.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게 <우견아랑>인데, 어린 마음에 훌쩍거리며 봤거든요. 주윤발이 얼마나 착한 청년으로 나왔다고요. *.*
아무: 저런, 근데 그 여린 마음에 이렇게 칼을 꽂나? ^^
이크: 마자마자. -.-그리고 <지존무상2> 찍고 <주성치의 심사관> 찍었던 두 감독이 이리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쉰을 넘겨 대단한 거보인 듯.
아무: <지존무상2>는 대학입시 끝나고 친구들에 휩쓸려 단성사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학창 시절 시험 기간 끝나면 홍콩 누아르로 스트레스를 해소한 세대가 있잖아요? 지금 성인이 된 그 세대 관객이 다시 친구들을 소집해 이 영화를 같이 보고 맥주라도 마시면 참 즐겁겠다 싶어요. ^_^
이크: 사실 두기봉의 베스트는 <흑사회> 시리즈일 텐데 <흑사회>도 전 영화와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리고 <익사일>은 스타일상으로 거의 <흑사회>의 반대말 같고요. 앞으로 어떤 영화들을 만들지 진짜 기대됩니다.
아무: 이런 기대쟁이! 만날 기대만 해요. ^_^
이크: 그 재미로 산다우. 그래도 마이클 베이 다음 영화는 기대 안 되어요. 더 기대 안 되는 건 롤랜드 에머리히. 그리고 유위강 감독 다음 영화도요. --;
아무: 참, 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들고 있는 김지운 감독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 궁금하더군요. 액션과 유머, 캐릭터와 사건이 서로 지지 않고 어우러지는 남자영화라는 점에서 비슷하니까요.
이크: 그런데 <익사일>의 극장 팸플릿 보면서 웃은 대목이 있어요. “결코 상업영화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액션 마스터 두기봉 감독 작품”이라고 크게 쓰여 있더라고요.^^ “결코 상업영화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이라니, 뭔 가 콤플렉스 같지 않아요? ^^
이동진: “공간 활용 방식도 참 훌륭해요. 호러가 공간에 대한 장르라는 것을 감안해도 정말 제대로 잘 활용했어요. 맨 앞과 뒤에 야외신을 넣은 선택도 좋았고요.” 김혜리: “<디센트>에서 촬영감독과 조명팀의 기여는 대단해요. 암흑 속에 빛이 떨어지는 구역을 잘 표현해서 극장 전체를 스크린처럼 느끼게 했어요.”
아무: 하하. “제품 표면에 하얗게 뜨는 분말은 결코 불순물이 아닙니다”라는 식품 포장지 안내문 같네요. ^_^ <익사일>도 그렇지만 <디센트>도 좋은 소문부터 날아왔던 영화인데요. 매우 무섭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이미 영화를 본 후배에게 옆자리에 앉아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어떤 일이 터질지 아는 인간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슨 주술처럼 안심이 되더군요. -_-# <디센트>는 일부러 아무 정보없이 봤어요. 등장하는 괴물이 어떤 부류인지, 아니 괴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봤는데 그게 적중해서 즐거웠어요. 잘 만들어졌다는 뜻이겠죠.
이크: 다 좋은데 이 토크의 근거를 허무는 발언이시구랴. -.- 에잇, 범인은 브루스 윌리스다, 라고 쓸까보다.
아무: 훠어이 훠어이. 건너뛸 분들 건너뛰시고요. 자자, 남아계신 분들은 돌 던지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사인하시고…. ^.~ <디센트>는 지하 동굴 탐험을 떠난 여자친구들이 만나는 지옥 같은 경험을 그리죠.
이크: 저기, “동굴의 괴생명체” 정도는 써도 괜찮겠죠? ^^
아무: “알고 보니 골룸 집안은 대가족” 정도도 괜찮겠죠. ^^ 아니 잠깐, 이건 골룸에 대한 모욕이 되겠는데요. 아무튼 외모가 비슷합니다.
이크: 닐 마셜 감독의 전작 <독 솔져>와 비교하면 CG를 쓰지 않았다는데도 특수효과 차이가 크더군요. 동굴의 어둠 속이라는 배경의 이점을 톡톡히 본 듯.
아무: <디센트>에서 촬영감독과 조명팀의 기여는 대단해요. 암흑 속에 빛이 떨어지는 구역을 잘 표현해서 극장 전체를 스크린처럼 느끼게 했어요. 캐릭터가 극중에서 들고 있는 횃불, 랜턴 등만 되도록 써서 조명했는데 광원에 따라 빛의 색채가 적절히 바뀌고요.
이크: 이 영화를 보다 몇번씩 객석을 휘둘러 봤어요.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넓은 객석을 확인해야 다시 영화를 볼 수 있었거든요.
아무: 영화, 성공이네요. ^^ 동굴로 내려가기 직전 여섯 여자친구들의 리더인 주노가 “폐소공포증, 환각, 탈수, 방향상실” 등을 경고하는데, 꼭 관객한테 하는 말 같죠?
이크: 정말, 공포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요소가 거의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 말초적 자극부터, 하드고어, 스릴….
이크: 심지어는 트라우마도 있어요. 익스트림 스포츠와 공포가 연결된 것도 참신했어요. 요즘 흥미로운 것은 장르의 혁신이 변방에서 일어난다는 거예요. 최근 영국 장르영화들, 장난 아닌 것 같아요. <뜨거운 녀석들>의 에드거 라이트도 그렇고, 로맨틱코미디도 그렇고.
아무: 익스트림 스포츠로 단련된 여성들이 주인공이라는 점과 관련해, 잘 다듬어진 근육과 합리적 판단력을 가진 성인 여성들이 나와 해결의 주체로 행동하니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요.
이크: 여성 캐릭터의 그런 묘사가 저도 좋았어요. 아예 극중에 남성 캐릭터가 없으니까 눈치보거나 내숭떨 필요가 없었고요. ^^
아무: 남자들이 주변에 있어도 그럴 여자들은 아닌 것 같았는데. ^^
이크: 공간 활용 방식도 참 훌륭하죠? 호러가 공간에 대한 장르라는 것을 감안해도 정말 제대로 잘 활용했어요. 맨 앞과 뒤에 야외신을 넣은 선택도 좋았고요.
아무: 대부분이 세트였다고 하더군요. <디센트>를 보면서 그녀들을 가둔 동굴이 마치 자궁의 내부 같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더군요. 피와 점액질의 이미지, 좁다란 굴도 그랬고, 인물이 지면과 같은 높이로 겨우 얼굴을 내미는 장 면에서는 산도에서 간신히 빠져 나오는 태아를 보는 듯했죠. 물론, 거대한 동물의 소화관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요.
이크: 근데, 그 많은 볼거리들을 선사하면서도 캐릭터들의 개성이나 심리를 적절히 묘사해내는 것도 놀랍지 않아요?
아무: 그러나 여섯 여자 중 샘과 레베카, 두명의 캐릭터는 좀 모호했죠. 구성상 불가피했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이크: 호러 장르 영화로서 어떤 인물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 하는 선택도 영리하게 해낸 것 같아요.
아무: 사실 갈등관계인 두 여자, 세라와 주노가 자매애로 마지막 장애를 초월한다는 결론도 내심 예상했는데 말이죠 ^^ 불만은 없어요. 여자가 남자보다 인도적이어야할 의무는 없죠. (내심 그렇다고 믿을지언정) 미덕을 강요받고 싶진 않아요. 저는 <디센트>의 괴생물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데요. 실은 그들이 여자들을 공격하기 전에도 극중에 상당한 공포와 긴장이 전개되고 있기에 꼭 필요할까, 의구심도 있었어요. 지금도 있고요.
이크: 그건 필요에 의한 게 아니라, 감독 자신의 본능적인 선택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르영화 감독으로서 닐 마셜은 그런 장면을 꼭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감독인 것 같아요.
아무: 그렇군요. 전 다짜고짜 생사람한테 뛰어들어 뜯어먹는 그들을 보며 어려서 읽은 전래동화의 구미호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구미호가 인간이나 소의 몸에 손을 쑥 집어먹어 간을 빼먹는다는 이야기의 이미지를 매우 강력했거 든요. +_+
이크: ^^ 사실 늑대인간 영화나 좀비영화에는 그런 장면들이 반드시 들어 있죠. 장르의 인장 같은 거랄까요. 저는 이 영화가 존 부어맨의 <서바이벌게임>이 <프레데터>를 만난 영화라고 봤어요.
아무: 그 밖에도 많은 인용이 있죠. 유머도 없다고 말할 순 없어요. 문제의 괴생명체가 피로 가글할 때라든가…. -_-# <익사일>이나 <디센트>나 결점이 있다고 해도 나중에 떠오를 뿐, 영화를 보는 동안은 그 결점이 즐거움에 방 해가 되지 않는 영화라는 점이 제겐 같았어요. 사실 결점이 몰입 자체를 방해하는 영화가 더 많잖아요.
이크: 그런데 <디센트>의 결점은 뭔가요? 저는 <익사일>의 결점-즉석 사진 찍는 장면이 영화 보는 데 방해되던데요.
아무: 홀리와 베쓰 역의 배우의 개성이 좀더 활용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고요. 주인공 중의 주인공인 세라의 연기 혹은 시나리오상 묘사가 다소 불충분하지 않았나 싶었어요.
이크 : 제 생각은 달라요. 특히 베스는 최적으로 인물을 쓴 경우라고 봤어요. 베스 캐릭터를 처리하는 것을 보고 감독이 정말 관객을 완전히 손안에 쥐고 흔들면서 영화를 찍는구나 싶었거든요. 이런! ‘처리’라니 베쓰에게 미안하 네요. ^^
아무: 같은 장면을 두고 저는 주노 중심으로 생각했어요. 괴생물체를 때려눕히는 영웅적 활약으로 주노가 관객에게 잃었던 점수를 만회하려는 찰나, 그녀가 베스에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잖아요? 거기서 감독의 자신만만함을 봤어요.
이크: 어쨌든 <디센트>가 과락이 전혀 없는 모범생 영화라면, <익사일>은 100점도 맞고 20점도 맞는 좀 이상한 천재의 영화 같죠.
이동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 보면서 독일인의 삶이 우리의 삶과 엄청나게 다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섹스에 대한 태도, 가족에 대한 태도, 하다 못해 휴가에 대한 태도까지, 사실 약간의 문화충격까지 있었어요.” 김혜리: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는 인간이 지닌 아주 모호한 악의에 관해 말하고 있죠.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아니 자기도 안 보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선한 의지의 방기 같은 거요.”
아무: 요즘 들어 독일 배우 마티나 게덱을 이래저래 스크린에서 자주 보게 되네요. <타인의 삶> <굿 쉐퍼드>에 이어 독일에서 온 개봉작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에도 출연했습니다.
이크: 영화마다 완전히 다른 인상입니다. <타인의 삶>에서 제일 아름다웠어고요.
아무: 그런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라는 제목은 조금 어폐가 있죠?
이크: 일단 틀린 말이죠. 굳이 맞게 고치려면 <미필적 고의가 있었던 여름휴가>? 여름휴가를 미필적 고의로 간 게 아니니까요.
아무: 마티나 게덱이 분한 주인공 미리암은 아들의 열두살짜리 여자친구 리비아를 바캉스에 데려갔다가, 우연히 만난 성인 남자 빌과 가까워지는 리비아를 보호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미리암 자신이 소녀를 질투하는 입장에 처하면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죠. 제가 제목을 짓는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악행> 정도? 아니, <그해 여름>은 어때요? ^_^
이크: (저도 그 제목 생각했어요. ^^) 사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은 너무 적극적으로 영화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줘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야 할 숙제 거리인데, 제목에 박아버렸죠.
아무: 제목만 보곤 에릭 로메르 스타일의 바캉스 영화를 상상했죠.
이크: 다 보고나니 좀더 순하고 상식적인 프랑수아 오종 영화에 가깝더군요.
아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는 어쨌든 기본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예요. 인간이 지닌 아주 모호한 악의에 관해 말하고 있죠.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아니 자기도 안 보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선한 의지의 방기 같은 건데요 . 이런 악의는 실제 삶에서 꽤 많은 결정을 좌우하지만 표현되거나 재현되는 일은 드물잖아요.
이크: 사실 심리적인 악의는 미필적 고의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미필적 고의인지 명백한 고의인지 헷갈릴 때가 있죠.
아무: 누가 맞을지 보이는데도 딴 데 보는 척하며 슬쩍 활시위를 놓아버린 뜨끔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거예요.
이크: 그런데 이 영화, 딱 한번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빼면 전혀 음악이 없다는 점 눈치챘나요? 이 영화의 서걱서걱한 느낌에 잘 맞더군요.
아무: 대신 세계대전 관련 TV 다큐멘터리가 몇 차례 나오는데 감독이 인간의 악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이크: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의 어머니가 미리암과 빌 “두분 행복하신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좀 잔인하기도 하더군요. 그 장면에서 미리암은 대답하는데 프레임 아웃된 빌은 답을 하지 않거든요.
아무: 사실 소녀의 어머니는 영문을 모르고 선의로 물은 거죠. 행복하다는 미리암의 표정은 진심으로 보였어요. 미리암은 “결국 그 애가 원했던 거야”라고 자기를 설득하며 행복해지는 것이 속죄라고 합리화할 수 있겠죠.
이크: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은 미리암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봤어요.
아무: 저는 미리암이 리비아를 요트에 태우고 나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배를 돌리지 않는 대목에서, 상대가 성인 여성이었다면 미리암이 그럴 수 있었을까 궁금했어요. 즉, 한쪽이 명백히 힘의 우위에 있을 때 미필적 고의 라는 것은 거의 흉기가 될 수 있죠.
이크: 처음에는 영화가 두 여자와 빌의 관계를 둘러싼, 다섯 인물- 아들과 남편을 포함한- 의 팽팽한 심리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중반 이후로 미리암쪽에 이야기의 비중이 확 쏠리더군요.
아무: 그렇죠. 미리암의 동거남과 아들은, 깔끔하고 편리하게 퇴장해버리죠.
이크: 미리암은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그 방향으로 나가는 능동적인 여자죠. 그러니까 미필적 고의라는 부분의 딜레마가 더 실감이 나는 것 같아요.
아무: 그리고 영화는 그런 능동성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타인을 만날 때 도를 넘는 미묘한 영역을 보여주죠.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당신에게 줄 것이 없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당신의 실체다.” 연애하는 여성에게는 남자친 구가 식당에 가서 종업원에게 보여주는 매너를 눈여겨보라고 하잖아요. 그게 몇년 뒤 당신을 대할 남자의 태도라고. ^^
이크: 식당에서 서비스하는 분들은 나한테 줄 게 있는 사람인데요. ^^ 전 무서워서라도 친절해요. 주방에 접시도 가지러 가요.
아무: 어머! 그렇네요. 하긴 화가 나서 접시를 탕 놓는 소리는 언제나 위협적이죠. -_-골프채로 골프공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그릇에 화풀이하는 소리는 제가 가장 무서워하는 소리죠.
이크: 그럼 골프채로 그릇에 화풀이하는 소리가 최악이겠네요. +_+
아무: -_-# 그나저나 열두살 소녀 리비아 역의 배우는 매력적이더군요. 노련한 마티나 게덱이 옆에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동안 그 소녀는 그저 카메라 앞에 있는 것만으로 꿀리지 않더라고요. (한숨) <달콤한 인생>에서 강 사장 의 대사가 생각났어요. “어린 게 잘난 거지.”
이크: 그런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 보면서 독일인의 삶이 우리의 삶과 엄청나게 다르다는 생각 안 했어요? 섹스에 대한 태도, 가족에 대한 태도, 하다못해 휴가에 대한 태도까지, 너무나 다르더군요. 사실 약간의 문화 충격까지 있었어요. 영화의 아이들이 너무나 쿨한 것이 10대 초반 소년 소녀가 “우리 관계 정리했어요. 그냥 섹스도 하는 친구가 되기로 했어요” 이런 대사를 해도 되는 거예요?
아무: 요즘 유난히 영이 맑고 총명한 아이들이 있다는 풍문 못 들으셨어요?
이크: *.* 지하철에서 영이 맑으시다는 이야긴 많이 들었죠.
아무: 아니, 이런 기막힌 우연의 일치가! 저도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