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보다 무서운 인간이 여기 있다
<다이어리> Diary/ 옥사이드 팡/ 홍콩/ 2006년/ 86분/ 부천 초이스
타이의 옥사이드 팡이 호러물의 재주꾼임을 보여주는 소품이다. 그닥 새롭지 않은 소재로 출발선을 잡고서, 게다가 적당한 복선과 관습적인 카메라워크를 지극히 제한된 공간 안에서 펼치는 것만으로 기승전결의 맥을 만들어낸다. 귀신은 없으나 귀신보다 무서운 인간이 있다. 선천적 악마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후천적으로 앓은 사랑의 후유증이 위니의 몸뚱이를 감싸고 있다. 그녀가 기괴한 기운을 내뿜으며 불길해 보이는 목각 인형을 만들어내는 건 저주의 영혼을 불어넣겠다, 는 의지가 아니라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일거리다. 그녀의 본업은 예쁜 뷰티숍의 점원이다. 그곳에서 나와 상당량의 생선과 고기를 사고, 그 생선과 고기를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칼로 다지며 요리를 만드는 건 저주의 카니발 의식이 아니다. 사랑하는 남자 세스를 위한 애정 행위다. 문제는 그 세스가 떠나버렸다는 점이다. 혹은 증발했거나. 그런 위니가 세스를 닮은 레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차를 마시자며 수작을 걸고, 마침내 비슷한 요리를 만들어 자기 집 식탁에 초대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건 레이다. 레이는 꼭 여자친구가 있을 것만 같은데 위니의 집에 아주 길게 머물며, 심지어 회사에서 잘렸다고 풀이 죽어서도 위니의 집을 떠날 줄 모른다. 그리고 점차 말을 잃어간다. 비밀 풀이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깜짝깜짝 놀라게 하지 않는 건 마지막 반전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식 서부영웅의 액션 모음
<다이너마이트 워리어> Dynamite Warrior/ 찰럼 웡핌/ 타이/ 2006년/ 103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옹박>에서 이미 증명했듯이 타이 액션은 역시 화끈하고 단도직입적이다. <다이너마이트 워리어>는 1920년 타이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서부극이다. 무대는 막 농업혁명의 물결이 다가오는 한가로운 시골. 탐욕스런 신흥부자 웽은 가난한 촌로들에게 고가의 트랙터를 팔아넘기려 한다. 물소에 익숙한 농민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웽은 숲속에 사는 식인 무법자를 포섭해 마을의 소를 죄다 훔치고 목동들을 살해하게 한다. 그가 이끄는 소도적떼에게 속수무책으로 소를 뺏긴 농민들은 도탄에 빠진다. 이때 정체불명의 방랑자, 조네 방 페이가 나타나 이들을 구원한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한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살해한 소도적떼에게 복수하려는 인물.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인 그는 마을을 어지럽히는 악당과 부모의 원수에 맞서는데…. <다이너마이트 워리어>는 카우보이 모자 대신 밀짚모자를 쓰고 바지를 걷어붙인 타이식 서부영웅의 액션 종합선물세트다. 미사일을 타고 나는 희한한 무공부터 발바닥을 접고 발목을 꺾고 무릎차기를 날리는 가차없는 액션신이 쉴새없이 펼쳐진다. 특수효과는 의도된 조악함을 굳이 숨기지 않고, 뼈와 뼈가 부딪치는 육탄 액션의 실감은 더욱 강조된다. 액션 마니아를 위한 색다른 체험.
인도네시아 사회를 비꼬는 누아르스릴러
<비밀> Kala/ 조코 안와르/ 인도네시아/ 2007년/ 102분/ 폐막작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누아르스릴러. 인도네시아의 신성으로 불리는 조코 안와르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 이번 부천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해외에 소개된다. 기자인 자누스의 삶은 여러 요구에 직면해 있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회사는 퇴직을 조장하고 기면증에 걸린 그의 신체는 잠을 재촉한다. 어느 날 대규모 방화사건으로 죽은 피해자의 아내를 취재하던 자누스는 사건의 비밀을 밝혀줄 정체불명의 단서를 입수한다. 하지만 단서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끔찍한 수법으로 살해되면서 자누스는 예상보다 더 거대한 비밀이 방화사건의 배경에 있음을 알게 된다. <비밀>은 점점 거대해지는 사건의 음모를 뒤쫓으며 현 인도네시아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을 내비친다. “모두가 살인자일 수 있다”고 말하는 극중 에로스의 대사처럼 정치상황과 맞물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이고, 도시에는 온갖 범죄들이 출몰한다. 정치적인 비판을 스릴러 형식에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전설을 빌려온 <비밀>은 6억원이란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매끄러운 완성도와 스타일을 구현한다. 국적과 장르의 만남이 낯설지만 그런 선입견에 휩쓸리지 않는 게 중요할 듯.
허먼 여우가 선사하는 고어의 성찬
<중국식 흑마술> Gong Tau/ 허먼 여우/ 홍콩/ 2007년/ 97분/ 판타스틱 감독백서: 허먼 여우
<팔선반점의 인육만두>로 잘 알려진 허먼 여우 감독의 따끈따끈한 신작. 누군가가 부린 강두술(降頭術)에 의해 갓난아이를 잃은 형사는 자신의 아내 역시 술법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두술사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면 아내의 목숨은 없다. 하지만 공포에 질려버린 아내는 아이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하고, 강두술사의 끔찍한 술법은 두 사람의 주위를 서서히 감돌기 시작한다. <팔선반점의 인육만두>로 전설적인 컬트감독의 지위에 오른 허먼 여우는 대가 같은 솜씨로 홍콩 경찰 장르와 오컬트 장르를 버무린 뒤 양념처럼 고어장면들을 끼얹어낸다. 기가 막힌 중국식 덮밥 요리술이라고나 할까. 관객이 낄낄거릴 만큼 키치적인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클라이맥스에서는 고어영화의 마니아마저 눈을 가리고 비명을 꽥 지르게 만들 만한 신체훼손 장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시아 고어의 끈적끈적한 향연에 익숙지 않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보는 게 낫다. 올해 회고전에서는 허먼 여우의 대표작 다섯편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중국식 흑마술>과 <에볼라 신드롬>, 그리고 <팔선반점의 인육만두>는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허먼 여우는 7월15일 <에볼라 신드롬> 상영 뒤 관객과 함께 ‘피판 데이트’를 가질 예정이다.
<네버 엔딩 스토리>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미러마스크> Mirror Mask/ 데이브 매킨/ 영국, 미국/ 2005년/ 112분/ 패밀리 판타
‘패밀리 판타’ 부문에 걸맞게 가족극으로나 판타지로나 손색없는 완성도를 즐길 수 있다. <네버 엔딩 스토리>와 같이 도대체 끝나지 않을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이야기의 연쇄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전후좌우를 예측하기 어려운 캐릭터와 사건의 연속이 벌어지리라 상상 가능하다면, 일종의 콜라주 기법으로 판타지를 흘려 가는 솜씨는 상상 이상이다. 아빠와 엄마가 경영하는 서커스단의 일원인 15살 소녀 헬레나는 되풀이되는 저글링도 싫고 우스꽝스런 분장도 지겨우며 무엇보다 떠돌이 생활이 싫다. 게으름을 피우다 엄마와 심하게 다툰 그날, 엄마가 쓰러진다. 서커스가 중단되고 아빠는 생활고에 쫓기기 시작한 단원들의 항의로 궁지에 몰리는데 설상가상 엄마가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 큰 수술을 받게 된다. 헬레나는 죄책감 때문인지 꿈 아닌 꿈속으로 빠져드는데, 처음엔 그곳이 자기처럼 서커스를 즐기는 친구들의 나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를 뿜어내는 마의 여왕이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백색 여왕의 나라를 점령하기 직전이다. 백색 여왕을 깨어나게 하려면 미러마스크를 찾아야 한다. 마스크 쓴 인간들, 사람 얼굴과 개 몸통의 스핑크스들 등이 헬레나의 모험길을 흥미진진하게 돋우다 보니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처럼 끼어 있는 현실세계 이야기는 사족 혹은 핑계처럼 느껴진다.
이치가와 준의 소녀 이야기
<내일의 나를 만드는 방법> How to Become Myself/ 이치가와 준/ 일본/ 2007년/ 97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찬란한 청춘’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그 나이의 소녀들은 제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매일매일 마음의 전쟁을 치른다. 주인공 주리는 학교도 가정도 재미없는 평범한 학생이다. 졸업식날 헤어짐을 슬퍼하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는 주리는 따돌림당하는 가나코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외로움을 감지한다. ‘코토리’라는 가명으로 가나코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한 주리는, 왕따당한 주리에게 활달하고 매력적인 친구 ‘히나’를 연기하게 한다. ‘코토리’가 보낸 문자메시지대로 행동하면서 ‘히나’는 점점 자신감을 찾지만, 이 역할 놀이는 소녀들의 마음속 미묘한 균열을 돌아보게 한다. <내일의 나를 만드는 방법>은 전학온 첫날의 떨리는 공기와 도식적인 교우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소녀들의 예민한 감성 등을 효과적으로 잡아내는 성장드라마다. <토니 타키타니>에서 카메라의 이동에 원작 소설의 심리를 실어 날랐던 이치가와 준 감독은 이번에도 촬영과 편집에 소녀들의 시선을 녹여넣는다. 카메라의 시선은 상념에 빠져든 소녀들의 눈길처럼 수시로 창틀과 책상 위의 무의미한 정경에 머물고, 화면 분할 기법은 떠들썩한 교실 한구석의 고요한 아이들이나 주인공들의 교차하는 시선을 잔잔하게 포착해낸다.
이야기가 당신의 삶이 된다면?
<스트레인저 댄 픽션> Stranger than Fiction/ 마크 포스터/ 미국/ 2006년/ 113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어떤 여자가 날 해설해!” 성실한 국세청 공무원 해롤드 크릭(윌 페렐)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다.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 주석을 다는 정체불명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 “그는 이 사소한 사건이 임박한 죽음을 예고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말을 들어버린 해롤드.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 목소리는 작가라는 결론을 내린 그는 문학교수 힐버트(더스틴 호프먼)의 도움으로 자기 명줄을 쥔 문제의 작가를 찾아 나선다. 한편 매력적인 제빵사 안나(매기 질렌홀)를 세무조사하던 중 둘 사이에 티격태격 사랑이 시작되고, 행복의 절정에서 그와 힐버트는 목소리의 주인이 주인공을 다 죽이기로 유명한 케이 에펠(에마 톰슨)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데…. <몬스터 볼>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마크 포스터 감독의 신작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찰리 카우프만을 연상시키는 메타픽션 구조의 절묘함에 삶(과 죽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녹여낸다. 포스터 감독은 현실과 픽션을 천연덕스럽게 뒤섞고는 관계의 윤리와 희망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이 영화는 지적이고 사려깊다. 윌 페렐은 코미디 연기에 진한 페이소스를 담아내고, 슬럼프에 빠진 골초 소설가를 연기한 에마 톰슨은 더없이 매력적이다.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영화.
<린다 린다 린다>를 사랑하는 당신께
<마츠가네 난사사건> The Matsugane Postshot Affair/ 야마시타 노부히로/ 일본/ 2007년/ 112분/ 부천 초이스
<린다 린다 린다>를 연출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신작. 사방에 놓인 순간들을 드문드문 엮어놓는 감성은 여전하지만 입 안이 찝찝할 만큼 기묘한 작품이다. 경찰인 코타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츠가네란 마을이 지겹다. 사건은 없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 이발소 주인과 살림을 차린 지 오래고, 닮은 곳 하나 없는 쌍둥이 형제 히카루는 동네의 구박덩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녀가 들어오면서, 마츠가네는 온갖 이상한 사건들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매우 정적인 마을 소동극인 <마츠가네 난사사건>의 주된 정서는 ‘조짐’이다. 주인공 코타루의 말처럼 마츠가네는 “어쩌면 뭔가 일어날지 모를” 기운들로 가득하다.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금괴를 둘러싼 소동이 일어나며 동네의 한 처녀는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한다. 영화는 마을의 이곳저곳을 잰걸음으로 종횡무진하면서 일상의 비틀어진 정서를 드러낸다. 야마시타의 연출은 언뜻 지루해 보이기도 하면서 뜻모를 웃음을 짓게 하고, 원인 모를 낯섦을 느끼게 만든다. <린다 린다 린다>를 사랑했던 관객이라면 야마시타의 감성이 어떤 용도로도 쓰이는지 알 수 있을 영화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