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6월29일~9월16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스누피를 테마로 한 미술, 건축, 패션, 생활디자인 전시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이 열린다. 2005년 스누피 탄생 55주년을 맞아 일본 전시기획사 We’ve가 작가 찰스 M. 슐츠의 부인과 유나이티드 피처스 신디케이트의 동의를 얻어 기획한 이 디자인 전시는 유명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재창조한 스누피 작품을 선보인다. 대중문화와 강박증을 테마로 활동한 국제적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 지난해 소개된 페이퍼테이너 미술관 설계로 우리나라서도 유명한 반 시게루 등이 이 작업에 동참했다. 일본 도쿄, 오사카에서 이미 40만명의 관람객을 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은 아티스트들의 작품부터 상품 브랜드와 결합한 패션, 생활소품 디자인까지 포괄하는 크로스오버 전시라는 점이 새롭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친숙한 캐릭터 스누피를 둘러싼 작가들의 다양한 해석. 이들이 본 스누피의 폐소공포증, 강박, 자아도취와 깨달음 등의 테마를 미리 살짝 공개한다.
“<피너츠>의 시학은 아이들의 모습에 슬쩍 감추어둔 어른들의 근심과 걱정을 재발견한다.”(움베르토 에코) 1950년 10월 첫 신문연재를 시작한 이래 50여년간 75개 국어로 번역된 <피너츠> 시리즈의 인기야 새삼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다. 야구도 공부도 어설프기만 한 애처로운 주인공 찰리 브라운, 담요를 끌고 다녀야 마음이 안정되는 조숙한 철학자 라이너스, 만사를 제 손 안에 휘둘러야 속이 시원한 그의 누이 루시 그리고 두발로 걷는 지적인 강아지 스누피는 연재가 끝난 뒤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남겼다. 움베르토 에코는 저서 <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에서 시대를 초월한 시리즈의 인기 비결로 개그와 선문답에 은밀히 함축된 ‘어른들의 노이로제’를 꼽은 바 있다. 자신의 교양을 증명하기 위해 다이제스트판 문고와 자기계발서에서 그러모은 잡식을 떠벌리고, 상대의 인정을 받으려 헛된 투쟁을 벌이는 현대인의 수고로움이 <피너츠> 속 순수한 아이들의 세계에서 언뜻언뜻 비쳐나온다는 것이다. 자기 고민을 털어놓으며 상대의 관심을 끌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찰리 브라운, 고민이 많아 구강기적 안정(담요와 손가락)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라이너스, 삶에 대한 어떠한 회의도 없는 이기주의자 루시 캐릭터가 만드는 피너츠의 소우주는 어른들에게 “돈주머니를 톡톡 털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축소판 ‘인간희극’”인 것이다.
스누피의 강박증은 ‘땡땡이’무늬로, 폐소공포증은 ‘쿠션’으로
그리고 <피너츠> 인기의 핵심엔 시리즈의 아이콘인 스누피가 있다. 사색하고, 소설을 쓰고, 수시로 변장을 즐기고, 나르시시스트인(물그릇에 비친 자기 모습을 더 보기 위해 물 마시기를 거부할 정도다) 이 강아지는 특유의 초연함과 엉뚱한 현실도피적 공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스누피의 변신은 창작자와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테마다. 85년 미국의 한 아트 갤러리에서 열린 <스누피 인 패션>이라는 전시는 펜디, 미야케 이세이 등이 스누피를 위해 디자인한 명품 옷을 선보였고, 98년 맥도널드가 각국 민속의상을 입은 스누피를 제공했을 때 홍콩선 새벽부터 인파가 몰려 경찰이 질서유지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 이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의 재미도 이 친근한 캐릭터들이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의 시각에서 어떻게 변용되고 재해석됐는지 확인해보는 데 있다. 그러니 이번 전시를 제대로 즐기려면 <피너츠> 캐릭터들의 성격과 특성을 미리 복습해두는 게 좋겠다. ‘아트 스테이지’와 ‘리빙 스테이지’ 두 가지 섹션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선 미술과 디자인, 상품에 구현된 스누피와 친구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면면들도 예사롭진 않다. 대표적인 작가는 스누피를 강렬한 ‘땡땡이’무늬로 뒤덮어버린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 지난 2월을 포함해 한국에서도 몇 차례 전시를 가진 구사마는 60년대 미국에서 반전 행위예술과 전위 패션쇼 등을 열며 활동한 현대미술가다. 오랫동안 앓은 정신분열증의 환영을 반복적인 물방울 무늬와 그물망 무늬로 표현했던 그가 이번엔 스누피에게서 강박증을 발견했다. 사랑스런 스누피에게 마구 덧칠된 점박이 무늬와 그물망, 금속 마카로니가 안쓰러울 정도지만 애정과 강박에 둘러싸인 스누피라는 구사마만의 해석이 담겨 있다. 지난해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페이퍼테이너 전시에서 종이로 미술관을 지었던 반 시게루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그가 출품한 세개의 개집은 1995년부터 유엔의 난민고등판무관 컨설턴트로 난민 보호와 구제에 종사해온 환경건축가 반 시게루의 건축 철학을 반영한 작품이다. 벽돌집이 가장 튼튼하다는 <아기돼지 삼형제>의 모티브를 뒤집어, 재해에 가장 취약하고 피해도 큰 벽돌집 대신 종이기둥으로 만든 스누피 집을 제안한다. 상업적인 수주를 거의 받지 않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번 전시에선 스누피를 통해 현재 자신이 진행 중인 스리랑카 구호 건축 활동을 홍보하고 있다.
그외에도 패션, 공예, 제품디자인 작품에서 스누피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만날 수 있다. 영국의 디자인 건축 사무소 클라인 다이섬 아키텍처가 스누피에서 주목한 건 폐소공포증이다.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지붕에서 일상을 보내는 스누피에게 집은 인테리어 소품과 같다는 해석으로 개집을 쿠션으로 재창조했다. 일본 무인양품(MUJI), 미국 IDEO의 디자이너를 거쳐 지금은 생활브랜드 ±0를 운영하는 세계적 제품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는 스누피의 특성을 3개의 입상과 주변 공간에 표현했다. 무기질의 대상에 따뜻한 니트옷을 입히는 패션디자인그룹 민트디자인은 <피너츠> 캐릭터 입상에 파스텔톤의 니트를 씌우는 작업을 했다. 일본 전시에게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네일아티스트 미우라 가나코의 패디큐어를 받은 스누피상과 핫핑크빛 네일칩으로 만든 스누피 모자이크도 감상할 수 있다.
일본 전통공예, 고급 브랜드와 접목되어 생활소품으로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스누피와 일본 전통공예의 접목이다. 일본에서 처음 기획된 이 전시에선 헬로키티에게 기모노를 입히는 일본인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다. 에도시대 서민들의 목면수건에 스누피의 성격을 묘사해 넣은 테누구이, 전통 방식으로 떠낸 닥종이로 만든 스누피 머리모양 전등은 실용상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말린 꽃잎을 하나하나 눌러 만든 오시바나 공예작품에선 수백개의 꽃잎에 새겨진 스누피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3D로 구현된 수묵애니메이션 <꽃은 붉구나(화홍)>는 이번 전시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 웹 솔루션, 광고영상 등을 만드는 테크놀로지 집단 팀랩이 만든 이 6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전통예술 ‘에마키모노가타리’(긴 두루마리에 그린 스토리가 있는 회화)를 영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4대의 PDP 스크린을 가로로 이어붙여 만든 작품이다. 정원에서 한가로이 꽃을 바라보던 스누피가 가마와 학을 타고 세상을 유람하는 백일몽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 단아한 수묵화로 그려진 스누피 이미지도 신선하지만 시점을 무한히 넘나들며 여행하는 듯한 동양산수화의 미학이 3D 그래픽으로 구현돼 흥미롭다.
작가들뿐 아니라 상업 브랜드가 대거 참여한 터라 전시 관람인지 윈도 쇼핑인지 혼돈을 일으키는 작품도 많다. 루이 14세 때부터 내려온 프랑스 고급 크리스털 브랜드 바카라는 스누피 캐릭터가 정밀히 세공된 샹들리에를, 일본 자기회사 하쿠산 포슬린은 스누피 식기를 내놓았다. 홍차 블렌드 아티스트 구마자키 순타로가 내놓은 스누피 홍차 ‘SPOOTEA’의 발상도 재미있다. 소심한 찰리의 홍차엔 밀크티 베이스에 캐러멜과 너트의 풍미를 섞는 등, 캐릭터 성격에 맞춤한 홍차 제품을 세트로 출시한 것. 모든 전시를 둘러보면 한국의 창작그룹 노네임노샵이 마련한 포토존을 즐길 수 있다. 흑백의 피너츠 만화를 폼보드에 인쇄해 설치한 이곳에선 마치 신문 만화 안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라이프디자인전’이라는 이름에서 미리 명시한 대로, 캐릭터 상품과 긴밀한 이번 전시는 디자인의 숙명인 상업성을 부담없이 즐길 기회이기도 하다. 쇼핑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둘러보는 게 이번 전시를 즐기는 바른 방법이다. 최근 급성장한 명화전과 어린이 대상 전시와 달리, <스누피라이디자인展>은 가족과 어린이 관객뿐 아니라 스누피를 기억하는 20~30대 여성층의 소비 문화를 공략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캐릭터를 매개로 낯선 현대미술과 디자인을 부담없이 즐기는 컨셉이다.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이 교과서용 명화나 난해한 디자인전과는 다른 재미를 쏠쏠하게 선사한다는 건 분명하다. 캐릭터에서 무한히 변주되는 디자인의 즐거움, 올 여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글 스누피와 함께 누려보시길.
스누피에 대한 사소한 상식들
낑낑, 내가 사실은 58살이라고!
스누피의 등장 우리에겐 <피너츠>라는 원제보다 ‘스누피’가 더 익숙하지만, 스누피는 처음엔 연재가 시작된 지 이틀 뒤인 1950년 10월4일에야 등장한 조연이었다. 스누피가 처음 생각을 표현한 건 2년 뒤인 1952년 5월27일, 두발로 걷기 시작한 건 1956년 1월5일부터다.
스누피의 언어 스누피는 말이 없다. 대신 생각을 의미하는 말풍선으로만 의사를 표시한다. 다른 피너츠의 캐릭터들처럼 스누피도 비속어, 은어, 줄임말을 전혀 쓰지 않고 문법을 철저히 준수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들은 “하버드의 언어”를 쓴다고 할 정도.
스누피의 공상 몽상가 스누피는 언제나 지붕에 올라 꿈을 꾼다. 원작자 슐츠는 “그는 살아남기 위해 공상한다. 안 그러면 지루하고 비참한 개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라고 설명했다.
스누피의 집 겉보기와 달리 내부 면적은 상상을 초월한다. 침대, 당구대, 탁구대, 텔레비전, 샤워실, 자쿠지 욕조까지 있다.
스누피의 밥 그릇을 5280회 굴리면 1마일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미루어보아 직경은 10.25cm 정도로 추정된다. 밥그릇은 빨간색, 물그릇은 노란색이다. 가장 좋아하는 개밥 브랜드 이름은 ‘1차대전 비행 경험이 있고 불어를 좀 아는 강아지를 위하여’다.
스누피의 상징 조종사 변장 덕에 스누피는 미국 공군과 NASA의 마스코트로 자주 쓰인다. NASA 직원들은 아폴로 10호의 비행모듈을 스누피, 지상 명령 모듈을 찰리 브라운이라 불렀다. NASA 우주비행복에 쓰이는 흑백 헬멧도 “스누피 캡”으로 통칭된다. 슐츠가 평생 가입했던 생명보험사 메트라이프(MetLife)의 상징도 스누피다. MetLife는 이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의 공식후원사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