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흰 양복정장 하루 럭키담배 세갑/ 윗주머니 화려한 손수건이 꽂혔다/ 구두에는 먼지 하나 앉지 못한다/ 먼저 눈빛으로 죽였다/ 다음 한마디 말로 죽었다/ 이 두 가지가 아까우면 처음부터 한방 주먹.” 고은의 <만인보>가 말하는 임화수는 머리없는 주먹대장이었다. 그 주먹의 유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의 승승장구를 보면 알 수 있다. 1919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그는 평화극장 매점원이 되기 전에는 절도로 한 차례 옥살이 전력까지 있는 백수였다. 그런 그가 “걸핏하면 한방 먹이는” 주먹 솜씨로 극장가를 휘어잡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남현, 김진규, 윤일봉 등 당시 유명 배우들은 물론이거니와 극장 주인들도 그의 주먹 맛을 본 뒤에 “고개를 숙였”고, 그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 직함까지 얻게 된다. 매점원에서 영화계 대표인사까지, 이만한 초고속 승진이 또 있을까.
임화수는 충무로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만 호랑이였던 것은 아니다. 반공예술인 단장, 반공청년단 단장을 지내며 “이승만 정권 행동대의 두목”이었던 그의 파워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른바 합죽이 구타사건(<씨네21> 604호)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코미디언 김희갑에게 전치 8주의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임화수가 불구속 입건된 뒤 경무대 치안국장 기밀실에서는 상식 이하의 문책이 이어졌다. 당시 이승만의 경호책임자인 경무관 곽영주는 임화수가 경찰에 불려다녔다는 이유만으로 관련인들을 불러 책임을 물었을 정도다. 이 자리에서 곽영주가 “이봐, 임화수씨로 말하면 한국 예술계의 대표적 인사요, 앞으로 문교 장관이 되실 분이란 말이야”라고 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 이 일이 있은 뒤 전치 2개월이라는 진단서를 받았던 김희갑은 2주 만에 병원을 나서야 했고, 관련 경찰 책임자는 파면당했다.
여배우들을 정치인들의 노리개로 삼은 것도 임화수 때부터의 일이다. 측근에 따르면 “임화수는 약한 사람 발길로 차거나 그렇게 난폭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여배우에게 주먹을 날린 적도 적지 않았다. <운명의 손>에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키스신을 선보였던 윤인자는 “임화수 때 제명처분당할 뻔했잖아. 임화수가 청와대 가면 쩍하면 여배우들 불러가고 그랬는데 ‘난 못 간다. 남편 있는 여자가 그거 왜 가니’ 그랬더니 아 ‘윤인자는 제명처분을 줘야 한다’고 그랬다”고 전한다. 6작품이나 가케모치(동시출연)하는 통에 제작자들의 사정으로 제명처분을 면했다는 윤씨는 반말을 지껄이는 임화수에게 대든 적도 있었다는데, “(내가) 소리를 질렀더니 (임화수가) 멋쩍어가지고. 쩍하면 주먹 나갔잖아”라고 덧붙인다(<한국영화를 말한다>). 목에 핏대 높였다가 목으로 피 토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배우들 앞세워 선거운동을 하고, 당선파티에는 화초기생으로 불러앉히는” 것 외에도 임화수의 악행은 셀 수 없이 많다. 흥행 대목 중 하나였던 정월 초하루에 깡패들을 동원해 프린트를 뺏어다가 자신의 극장에 갖다 붙이는 것은 다반사. 일각에선 영화인들의 수입에서 세금을 감면하게 해준 것은 임화수의 공로라고 추어올리지만, 이른바 한국연예주식회사를 만들어 영화제작, 매니지먼트 사업을 벌였던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에 배우들을 강제로 출연시킨 것이나 출연료를 주지 않는다는 불평을 깡으로 뭉갠 사례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임화수는 셈 하나 만큼은 기막히게 좋았다고 한다. 원로 영화인들은 그의 눈앞에서 10원짜리 하나 삥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서대문, 종로 일대의 어깨들이 영화계에 대거 진출한 것도 임화수가 영화계를 주름잡던 때였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독재자(들)의 최후는 급작스러웠고, 또 비참했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던 임화수는 1961년 혁명재판을 통해 사형당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도끼와 갈고리로 내리친 죗값이었다. 그를 비호하던 곽영주도 함께 발포책임자라는 죄목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과잉충성으로 겨우 정권을 유지하던 이승만도 권력을 잃었다. 고은의 표현대로 짧은 혁명이 왔고, “임화수와 임화수(들)”은 사라졌지만, 충무로에는 임화수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았다. 임화수를 따르던 영화인들에 대한 문책도 잠시, 충무로에는 임화수라는 유령이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었다. 전근대적인 방식의 제작관행과 고약한 습성이 충무로의 전통인 양 40년 가까이 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까닭은 제2의 임화수가 되고 싶어 안달했던 영화인들의 책임이 컸다. 1960년대 중흥기를 맞이했던 한국영화가 이후 맥없이 주저앉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참고자료 <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펴냄) <만인보 21>(고은 지음, 창비 펴냄)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