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코앞이기는 한가보다. 에어컨 광고가 눈에 계속 들어오는 걸 보니. 때 이른 무더위에 광고 없이도 에어컨이 잘 팔리기는 하겠다만 그래도 이런 계절을 알리는 광고가 없으면 또 섭섭한 법. 근데 척 보기에도 시원해야 할 국내 에어컨 광고들, 특히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휘센과 하우젠 에어컨 광고를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더위가 느껴진다. 분명 색감이나 화면이나 바람이 슝슝, 빙하가 둥둥, 파랗고 하얗고 시원하게 찍으려 노력한 것이 맞는데도 보는 이 몹시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채를 찾게 되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혹시 더운 날 더 덥게 만들어 에어컨을 하나라도 더 판매하려는 LG, 삼성 양사의 눈물겨운 공동 마케팅 전략인가!
늦은 아침 갓 눈을 떴는데도 누군가 메이크업을 해준 듯 완벽한 얼굴의 영애씨가 “늦은 아침엔 브런치”란다. 그래, 요즘 브런치가 유행이긴 하지. 그러더니 난데없이 “슈베르트가 좋다”네. 누가 물어봤냐고요. 아니 뭐, 그래도 여기까진 취향 참 고상하다며 끄덕일 수 있다. “그리고 바람은 지금 와카티푸 호수의 세레나데”랍니다. 와카티푸라는 침 튀기는 이름의 그 호수는 어디 붙어 있는 것인지 궁금한 나는 끝내 구글신의 힘을 빌려 그것이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호수 이름이란 것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아마도 카피라이터가 작년에 뉴질랜드로 휴가 다녀오셨나보다. 그런데 어쩝니까. CF를 보는 사람 중 와카티푸 호수의 바람이 어떤지, 호수가 어찌 세레나데를 읊조리는지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저 브런치와 세레나데와 와카티푸(아, 발음 한번 진짜 어렵다) 같은 괜히 뭔가 물 건너온 것 같은 어울리지 않는 낱말들의 어색한 조합에 썩소를 날려주고 그 번들거리는 기름을 기름종이로 꾹꾹 눌러 닦아내고 싶을 뿐. 아, 김치 먹고 싶어라.
하우젠 에어컨도 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일찌감치 온에어되었던 첫편은 그리스 신전을 본떠 만든 세트에 ‘아아아아’ 하는 비장한 음악이 깔리고 장진영이 흰옷을 휘날리며 공중을 떠다닌다. 처음 보고는 ‘뭐야 이거, <백발마녀전>이야?’ 하고 기겁했는데 아아, 그 이름도 위대하셔라, 무려 ‘바람의 여신’이랍니다. 그리고 이어진 후편에는 그리스 신전의 돌기둥을 거니는 비몽사몽 표정의 장진영이 에어컨을 애인 쓰다듬듯 만지며 “세상 모든 바람아, 바람의 여신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데 얼굴이 화끈화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가장 최근 온에어된 세 번째 광고에서는 그나마 좀 힘을 뺐지만 역시나 온 바닥 먼지 다 쓸고 다닐 것 같은 질질 끌리는 드레스는 포기하지 않고 미스코리아 피날레 걸음으로 저택을 거닐어주신다. ‘바람의 여신’이라니 정말 초등학생 소녀를 대상으로 한 순정만화에도 요즘엔 낯간지러워서 그런 이름 안 쓴단 말이다.
화면 예쁘고 모델들도 나무랄 데 없이 어여쁜 이 광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민망한 것은 이들이 최대한 럭셔리하고 세련되어 보이고 싶어한다는 욕망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아~무 이유 없이 빈 껍데기에 금칠 백번!’의 전략을 취하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촌스럽다는 데 있다. 크고 육중하고 조각 화려한 가구를 발 디딜 틈도 없이 거실 한가득 들여놓은 졸부의 거실을 보는 듯한 부조화와 우스꽝스러움이 CF 전체를 지배한다. 아직도 ‘고급=금칠’이라고 생각하다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
제품과 브랜드에 따라 고급스러움의 표현 방법은 달라야 한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분명 명실상부한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지만 그렇다고 모델이 세레나데를 부르며 머리에 월계관 쓰고 자동차 위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광고를 한다면 분명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냉방기기 아닌가. 제발 오버하지 좀 말자(하긴, 난데없이 신전 제단에 껌 갖다 바치는 자일리톨 광고보다야 좀 낫긴 하다만).
내용없이 그저 럭셔리 전략이라며 브런치니 뉴욕이니 와카티푸니 여신이니를 들먹거려 통하는 시대는 지났다. 빈약하고 얄팍한 금칠로 오히려 촌스러움을 강조할 뿐이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라는 패션지의 단골 경구는 대한민국 여성들이 아니라 에어컨 회사들에게 먼저 들려주어야 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