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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칸영화제 결산] 칸은 ‘무(모)한 계급투쟁’의 장!
글·사진 양해훈(영화감독) 2007-06-14

<친애하는 로제타>로 단편 경쟁부문에 진출한 양해훈 감독의 칸영화제 유람기

<친애하는 로제타>로 단편 경쟁부문에 참여했던 양해훈 감독이 칸영화제를 다녀온 소감을 적어왔다. 그가 칸에서 느낀 신 귀족사회, 또는 ‘계급투쟁’에 대한 단상을 소개한다.

이것이야 말로 무(모)한 도전이다. 해외에 처음 나가보는 촌뜨기 둘이서 전혀 준비도 없이 프랑스로 가는 짓 같은 것 말이다. 인디포럼이 끝나자마자 나와 정희성(촬영감독)은 무작정 비행기에 올라탔다. 짧은 영어 실력을 가진 우리에게 칸영화제 기간은 그야말로 민폐요, 재앙이요, 도전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 도전을 무(모)한 계급투쟁이라고 부르겠다.

파리를 경유해 니스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같은 비행기에 탄 한국 사람들에게 칸까지 어떻게 가느냐, 같이 택시를 타면 안 되느냐, 기차는 어디서 타야 하느냐를 연신 물어보고 다녔다.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버스를 타겠다는 사람, 삼삼오오 택시를 타겠다는 사람, 그중 나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어떤 아가씨에게 택시를 타자고 졸랐다. 그분도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이 같이 동행하자고 하다니. 그 사람이 곤란한 표정을 지을 때쯤 공항 한쪽에 외국인 여자가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진짜 내 이름인가 몇번이나 확인했다. 분명히 내 이름이었다. 그 외국인 여자는 영화제쪽에서 나온 도우미였다. 단편이긴 해도 공식 경쟁인지라 의전용 차량이 픽업을 나온 것이다. 여태껏 조르던 아가씨에게 무안해졌다. 그 아가씨는 번쩍번쩍한 의전용 차량에 탑승하는 우리의 모습을 쳐다본다. 나도 의전용 차량에 앉아서 그를 쳐다본다. 미안함에 고개를 숙여보지만 수습이 안 된다. 젠장, 편안하게 칸까지 갈 수 있겠지만 기분이 찜찜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영화제나 게스트가 가장 처음으로 하는 게 아이디 카드를 찾는 일이다. 우리 역시 의례적인 절차처럼 카드를 찾았다. 카드를 찾고 영화를 볼 때쯤 우리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놈의 영화제에선 카드 색깔에 따라 철저하게 계급이 나뉘는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 일행은 같이 영화를 볼 수도 없고 서 있는 줄도 달라진다. 이 해괴한 시추에이션이 무엇이란 말인가? 칸영화제는 크게 다섯 가지 계급으로 나뉜다. 각 국가의 공적인 영화단체나 국제영화제 타이틀을 가지고 방문하는 계급(정치하는 자), 감독이나 제작자 등 작품을 들고 방문하는 계급(만드는 자), 영화를 사고팔기 위해 오는 계급(사거나 파는 자), 취재하기 위해 오는 계급(널리 알리는 자), 마지막으로 일반 관객(일하는 자 혹은 제5의 신분)이 있다. 그리고 하나의 계급에서도 무수한 서열로 나뉜다. 칸영화제는 귀족사회로 회귀하길 열망하는 듯 보였다. 올해 경쟁작 중 한번이라도 칸영화제에 이름을 올린 감독- 이중에 3회 이상인 감독들도 있다- 은 구스 반 산트, 코언 형제,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왕가위, 가와세 나오미, 쿠엔틴 타란티노 등이 있다. 언론은 이들에게 ‘칸 패밀리’라는 말을 쓴다. 이 말엔 자신들이 발굴한 감독들만 보호, 장려하려는 칸의 대한 조롱이 섞여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고유명사는 칸의 브랜드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경쟁작을 상영하는 칸의 뤼미에르 극장 앞

레드 카펫 입장을 기다리는 양해훈 감독

블루 카펫- 경쟁작 외 작품들이 함께 상영되는 드뷔시 극장- 에서 줄을 서면 바로 옆에 있는 레드 카펫- 경쟁작을 상영하는 뤼미에르 극장- 극장에서 줄을 서고 싶게 된다. 칸은 맨 처음 하위 서열의 계급을 부여하고 그 다음 서열로 올라가게 되면 그만큼의 귄위와 명예를 부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저 맞은편에서 달콤한 사과- 서양인들이 언제나 사용하는- 를 가지고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귀족적 권위를 유지하는 것인지 모른다. 칸영화제에 처음으로 참여하는 나 역시 어쩌면 하위 서열의 계급을 부여받았는지 모른다. 그 안에 서서 저 높은 곳의 계급을 바라보고 있으면 높은 계급이 한없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의전 차량 안에서 느꼈던 찜찜함이 다시금 마음속을 훑고 지나간다. 그 찜찜함은 사유의 바다를 유영하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것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학생 시절에 가졌던 의문이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답을 찾아간다고 인지하고 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칸에서의 경험은 다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영화란 무엇인가? 솔직히 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답은 분명해졌다. 저 높은 곳을 향해 아첨하며 줄을 설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영화가 아닐 것이다. 영화는 투쟁이다. 그것도 무(모)한 계급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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