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물인가? 그것이 세상의 속된 기준에 민감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면, 흠흠, 쉽게 부정하지 못하겠다. 친구가 아파트를 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현재 시세가 궁금해지고, 그저 그렇다고 여겼던 작품이 유수한 문학상을 탔다는 말을 들으면 부박한 내 취향을 의심하게 된다. 스무살 때부터 쭉 좋아하던 전도연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던 날, 무슨 남다른 선구안이라도 타고난 양 괜스레 우쭐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 내가 속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는 매우 강력한 증거는, 늘 내 안의 속물성을 의식하면서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는 점일 것이다. 네이버의 부동산 카테고리를 검색할지언정 당사자 앞에서는 “그래서 그 집 정확히 얼마에 계약했는데?” 하고 물어보지 않으며, 남들은 다 좋다지만 내 눈에는 도무지 별로인 예술가의 이름은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절대로 밝히지 않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전도연의 연기를 품평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칸의 ㅋ 자를 발음하지 않고도 멋지게 말할 방법을 골똘히 연구할 것이다. 왜? 그게 조금이나마 덜 속돼 보이니까.
속되되 속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인간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는 허영의 포즈다. <밀양>의 여주인공 신애(전도연)는 어쩌면 그 사소한 허영심 때문에 불행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몇 발자국 뒤를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르는 한 사내가 있다. 면전에서 ‘당신, 속물’이라는 모욕당하는 남자, 카센터 김종찬(송강호) 사장님은 세속적 기준의 속물이라기에 부족함이 없다. 위조한 국제피아노콩쿠르 상장을 떡 붙여놔야 손님 좀 꼬인다고 믿고, 동네 유지와의 친분을 대놓고 과시하며, 꼬맹이들 피아노 선생으로 밥벌이하는 여자를 ‘피아니스트’라는 고상한 직업으로 소개하는 김 사장님. 그의 속됨은 참으로 적나라하여 투명하다. 삿된 허위의식으로 순수를 꾸미지 않으며, 순수의 태도로 허위를 가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잔머리 굴리지 않는 것이 이 순진한 속물의 사는 방식이다. 그것은 또한 그 남자의 사랑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사랑도 있다’는 <밀양>의 메인카피가 일종의 사기(詐欺)라는 쑥덕임을 들었다. 흥행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겠으나, 영화의 주제는 종교적 구원과 용서에 대한 것이지, 포스터사진이 풍기는 이미지처럼 남녀간의 은밀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의할 수 없다. 아니, 이게 러브스토리가 아니라면 대체 뭐가 러브스토리란 말인가. 동시에 마주보고 동시에 입맞추고 동시에 충만한 사랑만 사랑이 아니다. 상대의 완강한 등을 보며 비틀비틀 가야 하는 사랑, 보답받지 못해도 애걸할 수 없는, 그런 사랑도 사랑이다. <밀양>은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질문하는 영화인 한편,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도시 밀양의 속물 김종찬이라는 남자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묵묵히 응시하는 영화다.
종찬의 감정이 일종의 허영에서 출발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서울에서 온 신애는 컬러링조차 세련된, 분명 밀양에서 보기 드문 이국적인 존재이니까. 그러나 그 여자가 겪어내는 무시무시한 고난을 내내 함께하고, 그 처절한 내면을 어떻게든 쓰다듬어주려 안간힘 다하는 종찬의 사랑은, 어떤 순간 스스로의 중력으로 허영의 벽을 뚫고 우뚝 선다.
그녀가 제 손으로 머리칼을 자를 때 그가 거울을 들어주는 마지막 장면은 이미 충분히 낯익은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상투적으로 비칠 위험을 무릅쓰고 영화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것이 아마도 종찬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이 세속적인 남자가 자신이 아는 세속적 세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몸짓이다. 그때 황량한 땅바닥을 부끄러이 어른대는 가만한 햇살. 가장 낮고 비루한 곳에 가장 비밀스런 빛이 깃들 수 있을까.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천박하고 나약하고 위태로운 인간, 당신과 나, 우리에게도?
무턱대고 자꾸만 믿고 싶어진다. 그래, 성(聖)은 속(俗) 안에 있는지도 몰라. 초여름의 햇빛은 오늘도 무심히 부서지고, 나는 또 이렇게 나의 속됨을 허영허영 변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