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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칸영화제 결산] <문유랑가보>의 리 아이작 정 감독
김도훈 사진 오계옥 2007-06-14

“서구 관객이 아닌 르완다인에게 보여줄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재미동포 2세 리 아이작 정(정이삭·28)의 장편 데뷔작인 <문유랑가보>는 소름끼치는 대학살의 생채기로 고통받는 르완다의 심장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고아 소년 문유랑가보는 친구 상그와와 함께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를 처단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하지만 상그와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집에 잠시 들르게 되면서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문유랑가보는 복수를 위해 홀로 길을 떠난다. <문유랑가보>는 겨우 3만달러의 제작비로 거칠게 찍은 영화다. 하지만 <문유랑가보>는 이상할 정도로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으며, 빛바랜 필름에 찍힌 르완다의 거친 대지를 뒤쫓다보면 결국 거의 시적으로 아름다운 대륙의 아름다운 인간들을 발견하는 데 이른다. 진심 하나로 만들어낸 초저예산 장편 데뷔작으로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오른 감독의 기분은 어떨까.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저 작은 영화제에나 초청받기를 기대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직하게 만든 작은 영화일 뿐인데”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전날 공식시사에서 터져나온 기립박수의 여운이 여전히 묻어났다.

-영화제에 편집본을 보내서 곧바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다는 이야기는, 믿기지 않는 설화처럼 들린다. =(웃음).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저 작은 영화제에나 초청받기를 기대했던 영화니까. 영화를 시작한 이후 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부모님에게 항상 죄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의대에 진학하면 매일 잠도 못 자고 공부하고 일해야 하지 않나. 만약 첫 영화 이후 내 커리어가 가망이 없어 보이면 다시 의대에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칸에 초청받지 않았더라도 계속 영화를 했을 거란 생각은 든다. 강박관념이려나.

-원래 감독이란 뭔가 강박을 짊어진 인간들이다. 부모님이 동참하셨는데, 반응은 어떤가. =대단히 행복해하신다. 누나 말로는 자기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보다 더 즐거워한다더라. (웃음)

-르완다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아내에게 감흥을 얻어 만든 영화라고 들었다. <문유랑가보>의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해낸 것인가. =대학살 자체를 재창조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많은 르완다인들이 할리우드가 만든 르완다 학살 관련 영화를 보고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르완다인들이 트라우마를 벗어던지도록 도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특히 르완다에서 만난 고아들이 “내 부모를 죽인 자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왜 내가 그들에게 복수하면 안 되는지 이유를 말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스크립트는 즉흥적으로 더해진 부분이 많아 보인다. =10쪽의 기본적인 대본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르완다 현지에서 문화와 사람들을 대하고 9주 동안 그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것들을 바꾸어나갔다. 특히 현지에서 만난 두 소년의 이야기를 이야기에 접합하려 했다. 한명은 고아고 다른 한명은 부모를 두고 도망친 소년이었다. 가끔은 카메라를 끄고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데, 배우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깊은 감정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후투족과 투치족의 대립은 현재 어떤 상황인가. =두 부족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터부다. 그러나 진실은, 모두가 보기만 해도 후투와 투치를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이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는 인종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지금 르완다인들의 상황은 매우 인공적이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선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문유랑가보>는 기억의 여행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르완다 사람들이 오래전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현재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리고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인들은 기억 자체가 부재하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의 문제를 겪은 적이 있나. =나는 알칸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코카시안이 아닌 아이였다. 그래서 한번도 진짜 미국인이라고 느껴보지 못했다. 또 한국에 가면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한국인이라고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은 정말 오랫동안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걸 주제로 영화를 만드는 지금에야 이득으로 여기지만. (웃음)

-기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뭔가. 르완다에서 스탭을 구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고. =그래서 내가 카메라를 다 했다. 몹시 피곤하더라. 하지만 기술적인 문제는 없었다. 르완다는 전력이 잘 끊기기 때문에 디지털이 아니라 충전 한번으로 9시간 이상 가는 필름카메라를 썼다. 이런 나라에서는 최소한의 테크놀로지를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큰 스트레스는 필름을 르완다 밖으로 반출하는 과정이었다. 필름을 한번도 다뤄보지 않은 공항 직원들이 언제나 필름이 든 캔을 열려고 하거나, 한번은 엑스레이 머신에 집어넣는 걸 보고 달려가서 막은 적도 있다. (웃음)

-<문유랑가보>는 어쩌면 일종의 아트 필름이다. 하지만 오히려 르완다의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적절한 리듬과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더라. 르완다인들을 관객으로 설정하고 만든 영화인가. =그것이 바로 이 영화를 만든 규칙 중 하나다. 서구 관객이 아니라 르완다인에게 보여줄 영화를 만들자.

-어제 시사가 끝난 뒤 이창동 감독과 만났다고 들었다. =이창동 감독은 나를 한국 감독이라고 했다. 근데 나쁜 영화를 만들면 그냥 미국인 감독이라고 부를 거라더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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