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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굵어 즐거운 인물이여

<황진이>의 류승룡

류승룡이 맡은 송도 유수 김희열은 <황진이>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처음에 그는 “나는 한번도 원하지 않는 여자를 취해본 적이 없다”면서 아무리 기생이라도 네 마음이 싫다면 몸만 가져 무엇하겠냐며 짐짓 다른 남정네들과 다른 호방함을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미 확실한 결과를 놓고 그녀의 진심을 알아보기 위해 테스트를 할 만큼 야비하다. 밤을 지새우고 목적을 달성한 황진이가 돌변하자, “네가 지금 침을 뱉은 이 우물을 다시 찾을 것”이라며 희열은 싸늘하게 말한다. 호방함과 야비함, 그 양극의 매력이 류승룡를 끌었다. “희열은 굉장히 큰 역할이지 않나. 제작자로서 장윤현 감독은 내가 아직 대중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상태라 많이 주저했다. 이건 대본을 보고 내가 열심히 매달린 경우다.” 그럴 것이다. “남자들의 야망이나 연민이나 질투, 호탕함, 위선까지 다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 방법이야 잘못됐지만 지금으로 치면 지략가다. 아닌 말로 21세기에 놈이와 희열을 놓고 여성들에게 고르라고 하면 95%는 권력과 야망을 가진, 그리고 여자에게도 잘하는 희열을 선택하지 않겠나. (웃음)” 류승룡은 그가 한 역에 대해 “고상한 악”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말이 맞다. 그건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감옥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내가 하찮은 놈이보다 못하더냐”며 부정을 일삼은 관속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내리칠 때 그 어떤 쩌렁쩌렁한 호통보다 더 고상하며 살벌하다.

류승룡을 근래에 각인시킨 건 <천년학>이다. 여기서도 그는 영영 얻지 못할 여심을 그리워하는 시골 사내 용택이었다. 하지만 처음의 이미지가 “묵묵하고 항상 거기 있는 그냥 산 같은 캐릭터로 줄거리만 이야기하던 입장이었다면, 거기에 임 감독님이 생명을 넣어주셔서 애틋하면서도, 순박한, 그러면서도 괴팍한 인물이 됐다”. 순박함과 괴팍함. 용택의 그 기이한 행동과 화술은 그렇게 나온 것이다. “장진 감독과 찍은 환경영화 <소나기는 괜찮나요?>에서 시골 농부로 나온 걸 보고 처음에는 투박하고 순박한 이미지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웃음) 그런데 찍다가 내게서 다른 면을 보셨다. 감사하게도 순박함 속에 괴팍함이라는 장점을 심어주신 것 아닌가.” <천년학>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조연 중 하나인, 신비롭고 심지 굳은 사내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류승룡이 영화계에 처음 발을 들인 건 서울예대 1년 선배 장진 감독의 영화들을 통해서다. “<아는 여자>에서 분홍 복면이라는 은행털이 단역”으로 시작하여 <박수칠 때 떠나라>의 검사, <거룩한 계보>의 정순탄 등 벌써 장·단편 포함해 작품 수로만 9번째 같이 해왔다. 숨겨진 장진 사단의 요원이었던 셈이다. 그는 장진 감독을 자기의 영화 인생에 초석을 놓아준 사람으로 확신한다. “내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웃음), 실력이 있는데도 빛을 보지 못하고 무한정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장진 감독은 나를 첩경으로 인도해준 고마운 사람이다.” 류승룡이 잘나가던 <난타> 주인공을 그만둔 직후, 연극과 영화를 겸하는 문제를 고민하다 장진 감독을 찾아갔던 건 지금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그는 장진의 영화나 연극에 코드가 맞는다. 연말에도 류승룡은 그의 연극에 출연할지 모른다.

류승룡에 대해 우리는 영화 이전에 연극계의 보석으로 먼저 만난 적이 있다. 그 무대는 연극 <난타>였다. 주연배우로 “5년 동안 일했다. 다만 한 역할만 오래 하는 건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과감히 그만두겠다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인기 좋은 연극의 주연배우로 더 오래 남을 수도 있었지만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까봐 그만둔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하던 <난타>의 연출 일도 지금은 손을 뗐다. “자주 나가지도 못하면서 돈 받는 게 너무 미안해서”다. 지금은 어쩌면 그에게 중요한 전환기다. 우선 그가 이런저런 연극에서 “코미디를 많이 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다. “선이 굵어” 코미디는 잘 안 어울릴 거라는 편견을 그는 깨고 싶어한다. 그러니 언젠가 류승룡의 코미디를 본다고 해도 그건 그가 지닌 또 다른 기질의 발현이니 너무 놀라면 안 되겠다. 혹은 “언젠가 <웰컴 투 동막골>의 정재영이나 <왕의 남자>의 감우성, <아들>의 차승원 역할 같은, 옷을 벗거나 욕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공을 떠나서 어필할 수 있는 인물”로 나타나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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