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체육을 담당하셨다.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해로 기억하는 그때에 내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바로 ‘선착순 달리기’ 형식의 단체기합이었다. 50여명의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집합시킨 뒤 “선착순 3바퀴, 5명!”이라는 지침이 들려오면 바로 전력질주를 시작해야 했다. 5등 안에 들지 못하면 그때마다 다시 숫자만 맞바꾼 다음 지침에 맞춰 또 남은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것이다. 5m/s의 속력(100m를 20초에 주파하는 실력이다;;)으로 기합 때마다 수십 바퀴는 족히 뛰어야 했던 나는 이 기합에 두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째는 기초적 체력에 절대적으로 기반해 상위 몇명을 걸러내는 기합 시스템이 ‘단체’기합의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선착순 몇명 바로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오히려 불리하다는 점에서였다. 선생님이 ‘5명’ 까지만 ‘합격’시킬 경우, 6번째로 들어온 친구는 다시 뛰어야 하는 45명 중 가장 많이 체력소모를 한 나머지,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기합에서 선생님이 주문한 등수 안에 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인가 수학시간에 ‘가우스’를 배우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y=[x]로 표현되는 이 수식에서 [x](가우스 x)는 ‘x를 넘지 않는 최대 정수’라고 약속돼 있어서 x의 값이 3.03이든 3.9999998이든 y=3이 되는가 하면, x의 값이 4만 되어도 y=[4]=4로 결정되는 것이다. 가우스의 수식 앞에서는 3.9999까지 노력해봤자 3이고, 4.00001만 되어도 4가 되는 셈이다.
중학생 때 운동장을 몇 바퀴씩 뛰면서부터였는지, 고등학생 때 수학문제를 풀면서 비롯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식의 ‘억울함’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민감했었던 것 같다. 그게 좀더 공적 차원에서 발현되었더라면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열렬히 사회운동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성향은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이라는 가장 저급한 형태로 나타나게 됐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이런 소심과 우유부단은 잉여의 노력이나 비용을 발생시키지 않기 위한 고민이자 최고의 효용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하는 잔머리다. 그 고민과 잔머리의 한계상황에서는 각종 사주팔자, 별자리점, 타로카드 등을 보며 ‘신뢰에 가까운 참고’를 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하는 질문이라는 것들이 이것이 호기인지, 모험인지, 위험한지, 대박인지에 대한 다각적 탐구다. 그렇게 몇년을 살아오다 문득 서른에 접어들어서 뒤늦게 깨달은 사실. 그런 잉여의 노력을 회피하려고 해왔던 몇년 동안 나는 과연 주어진 내 인생의 다양한 선택을 통해 최고의 효용을 누렸는가. 비참하게도 ‘아니’다. 그러고보니, 선택하지 않음으로서 미리 포기했던 무수한 잉여의 노력들(0.3+0.9999998+…)이 또 하나의 합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간단한 논리를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만 나이 스물아홉을 앞두고 의도하지 않게 지난 29년을 뒤돌아봤다가, 이제야 깨달으니 그나마 철은 드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