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 당시 나는 가스총을 허리에 차고 있던 은행 청원경찰이었다. 군 제대 뒤, 아르바이트를 찾던 차에 어머니 친구분의 권유로 하게 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나는 점점 나름의 성취감을 얻기 시작했다. 아침에 인출기에 넣은 돈과 저녁때 빼낸 돈의 차액이 정확히 들어맞거나, 수표에 도장을 찍으면서 내 스스로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느낄 때. 또 전표 작성을 도와드린 할머니가 우유나 사먹으라며 꼬깃꼬깃 접은 1천원짜리를 내 양복 주머니에 몰래 넣고 갈 때나, 내 얼굴을 익힌 아이들이 은행문을 열자마자 인사할 때. 물론 매일 억대의 돈이 내 손을 거쳐간다는 사실도 재밌었다. 금고 안에서 전표 정리를 할 때면, 대리님과 나는 1억원씩 깔고 앉아 일했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는 1천만원 다발 5개를 밟고 올라섰다. 당시 내게 돈은 돈이 아니었다.
청원경찰로 산 지 약 두달이 지났을까. 어느덧 현금인출기를 내 손으로 직접 고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을 때쯤, 나는 돈을 자릿수가 아닌 부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인출기에 돈을 넣을 때 였다. 무심코 내 손을 봤더니 1천만원짜리 한 묶음이 알맞게 쥐어져 있었다. 평소 수도 없이 만지작거리던 1천만원짜리 묶음이었는데, 그것이 내 손에 쥐어진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말하자면 1천만원은 내 손바닥 정도의 두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묶음을 풀어 100만원짜리를 살펴봤다. 100만원은 내 새끼손가락의 한 마디도 안 되는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끝내야 했지만 나는 재미삼아 1천만원짜리로 1억짜리 탑을 세워봤고, 복숭아뼈를 지나서 내 무릎을 거친 돈다발들이 허리띠 밑부분에서 멈추는 광경을 목격했다. 나는 돈의 비밀이라도 깨닫게 된 듯, 2억원짜리 돈자루 위에 앉아 허탈한 마음을 달랬다. 적어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부피의 개념에서는 한달을 일하면 한 손바닥 정도의 돈은 벌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받던 월급은 80만원. 일년을 뼈빠지게 일해봤자 한 손바닥도 안 되는 돈이었고, 그대로 10년을 일해봤자 허리춤에도 닿지 않는 돈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남의 월급의 부피를 상상하곤 했다. 한달에 200만원을 번다는 학교 선배는 10년 일하면 농구선수 키 정도 되는 돈을 벌 것이고, 연봉이 3천만원이라는 친구 형은 그래봤자 한달에 발바닥에서 시작해 복숭아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벌 뿐이었다. 상상하면 할수록 돈의 부피는 너무도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100원짜리 동전 하나에도 만족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는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자리를 잡던 100원짜리 동전에서 묘한 풍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 그럴 수 없는 것은 돈의 가치를 알아버린 까닭도, 물가 상승률 탓도 있겠지만, 어릴 때보다 커버린 내 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100원짜리 동전 30개는 쥘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새끼손가락 한 마디를 조금 넘는 수입을 얻고 있고, 그조차도 벌기 힘든 세상을 깨닫고 있다. 그래도 이제 더이상 내 손이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