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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의 CF] 패러디, 좀더 뻔뻔해지든가

비틀기의 힘 20%쯤 부족한 국제전화 001의 패러디 광고

국내 패러디 광고의 시초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현재까지 가장 강력하고 기억에 남는 패러디 광고를 꼽으라면 단연코 ‘왕뚜껑’ 광고라고 생각한다. 일관되게 세련된 스타일을 고집하며 ‘It’s Different’라는 슬로건을 각인시켰던 SKY 휴대폰 CF를 ‘It’s Delicious’ 로 뒤틀고, 느끼한 클럽댄스를 추며 라면을 함께 먹는 코믹 버전으로 탈바꿈시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바로 그 CF 말이다. 시장에서 잊혀져가던 왕뚜껑이 그 광고를 계기로 매출이 엄청 뛰었다나 어쨌다나. 세련됨과 모던함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뻔뻔하게 비틀어 본래 CF와 정반대에 서 있는 키치와 개그를 만들어냈던 그 명민함이란. 보자마자 낄낄거리면서 오랜만에 왕뚜껑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으니 뒤통수를 치는 패러디의 힘이 정말 강력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난해엔 ‘돼지바’ 가 있었다. 중후한 배우 임채무의 변신도 충격이었지만, 온 국민이 손에 땀을 쥐며 열광했던 월드컵 경기 상황을 시침 뚝 뗀 얼굴로 돼지바에 적용한 철면피 정신이 고릿적 돼지바를 인기 아이스크림으로 되살려내는 힘을 발휘했다. 역시 패러디의 묘미는 노골적인 ‘뻔뻔함’과 ‘비틀기’에 있지 않으냔 말이지.

최근 또 하나의 패러디 광고가 등장했다. 우후죽순처럼 자라났던 서비스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광고로만 보자면 차감독-싸군 커플의 00700과 조인성-고릴라 커플의 001이 치고 박고 싸우는 2강 체제가 구축된 국제전화 시장. 001이 얼마 전 신문선 성대모사로 “차감독 걱정 좀 되겠어요”라며 살짝 약올리듯 잽을 날리더니, 이번에는 KTF의 커플요금 광고를 패러디해 아예 대놓고 00700에 펀치를 날린다.

경쟁사 모델인 싸이를 쏙 빼닮은 남자를 바라보는 조인성, “너 001이지?”라고 묻는데 아니라고 하자 데굴데굴 굴러 고릴라의 품에 안긴다. 조인성을 잃은 짝퉁 싸이가 발버둥치는 가운데 국제전화는 001이라며 마무리. 짝퉁 싸이가 버둥거리는 순간, 풋 하기는 했지만 뭔가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왜 왕뚜껑이나 돼지바 CF를 봤을 때처럼 마음껏 낄낄거릴 수 있는 통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걸까?

우선 패러디의 대상이 좀 미적지근하다. 패러디는 원본 텍스트를 모두 잘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물론 KTF의 커플요금 CF가 한동안 전파를 많이 탔던 건 사실이지만, 왕뚜껑이 패러디했던 SKY나 2002년의 월드컵 경기만큼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게다가 KT랑 KTF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다가 둘 다 통신업체를 가지고 있으니 마치 가재가 게를 놀리는 김새는 꼴이 되어버렸다.

KTF와 KT의 관계는 뒤에 묻어둔다 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패러디가 겨냥하는 대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다. 노골적으로 00700을 향해 펀치를 내지르는 시도는 훌륭하지만 그 펀치의 강도가 상대방의 맷집에 못 미치는 느낌이다. 001의 새 CF에서 조인성이 누워 있고 옛 KTF 광고 음악이 흐를 때, 이미 보는 이들은 눈치챈다. 이제 “너 001이지?”라고 묻겠구나. 그리고 데굴데굴 굴러가면 늘 그랬듯이 고릴라가 있겠지. 이 패러디에는 ‘뻔뻔한 비틀기’가 없다. 휴대폰을 사발면으로 대치하고, 레드카드를 돼지바로 바꾸어 본래 텍스트가 가지는 진중함을 하늘 너머로 가볍게 날려보냈던 능청스럽고 번뜩이는 비틀기가 보이지 않는다. 미끈한 모델들이 고릴라와 짝퉁 싸이로 바뀌었다는 것? 그게 충분한 패러디라고? 아니, 이들로 대체된들 본래 텍스트가 가지는 본질적 의미에서 바뀌는 것은 거의 없다. KTF와 SKT의 대결이 00700과 001의 대결로 바뀐 것뿐. 그저 “헷, 조인성-고릴라 커플과 짝퉁 싸이를 써서 패러디 했구나. 재밌네.” 정도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픽픽거리기만 한다. 비틀기가 없는 패러디는 소시지 없는 핫도그라고요. 더 뻔뻔해질 수도 있었잖아? 펀치를 날리려면 좀 세게 날리시지 그러셨어요.

이 CF가 그래도 헛주먹질이 아니라 약간이나마 경쟁사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웃음을 준다면 그것은 절묘하게 싸이를 닮은 모델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네, 모델 에이전시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차감독님, 별로 걱정 안 하셔도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