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저잣거리를 휩쓴 유행어 중 하나는 ‘깡패’였다. 옛 신문을 들춰보면, 대략 1957년 초부터 ‘깡패’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아녀자 폭행은 물론이고 화물열차 탈취까지 일삼던 불량 ‘어깨’을 정부가 대대적으로 단속하면서, 덩달아 ‘깡패’라는 말도 시중에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어원이 있긴 하나 깡패는 대개 ‘갱(gang)+패(牌)’라는 이상야릇한 합성에서 유래됐다는 목소리가 가장 높다. 백주대낮에도 무리지어 거리를 쓸고 다니며 못된 ‘깡’을 부리던 이들의 극성 때문에 “왜 인상 긁어! 배때기에 철판 깔았니?”라는 뜯어볼수록 험악한 문장까지 입에 오르내렸다. 이 무렵 ‘깡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를 다투던 유행어는 ‘공갈마’. 구라치고 완력 써야 입에 풀칠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사람이 꼬이고 돈이 몰리는 극장이라도 개관할라치면, ‘나와바리’ 확보를 위한 깡패들의 힘겨루기가 오프닝 세리머니처럼 열렸다. 1958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에 위치한 세기극장 개관식 때는 정부가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몽둥이, 돌, 쇠갈고리로 무장한 종로파와 명동파의 행동대원들이 ‘정오(극장 개관식이 공교롭게 12시였다)의 결투’를 펼쳐 지탄을 받았다. 이날 세기극장쪽에서는 종로파와 명동파, 어느 한쪽에도 밉보이지 않기 위해 개관식 기념행사 초대장을 고루 보냈는데, 그게 화근. 몸이 불끈 달아 있던 20대 초반의 액티비스트(?)들은 ‘맞장 뜨자’는 극장의 초대장을 상대파의 결투 신청으로 기꺼이 받아들였고, 결국 이날 사태로 극장 개관은 연기됐다.
영화계라고 이 같은 노릇에 혀를 찰 순 없었다. 1959년 11월29일, <동아일보>는 ‘권력 폭력 앞에 떠는 영화계’라는 머릿기사를 썼는데, 이른바 ‘합죽이 구타사건’이었다. ‘합죽이’라는 별명의 희극배우 김희갑은 당시 임화수에게 전치 4주의 폭행을 당했고, 사건 당시 입을 다물었던 그는 병원 침상에 누워서야 반공예술인단 주최 행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구타당했다고 진상을 털어놨다. 임화수. 극장 매점원 출신으로 시작해 주먹 하나로 반공예술인단 단장 완장을 차고, 유력 영화제작자 타이틀까지 거머쥔 그는 당시 영화계를 호령하던 무소불위의 제왕이었다. 김희갑은 “최무룡, 김진규 등 (임화수한테) 안 맞은 사람이 거의 없다”며 “권력과 폭력의 무방비지대에 있는 자신들을 국민이 보호해달라”고 호소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눈앞의 주먹은 더욱 크게 보이게 마련. 김희갑의 증언으로 여론이 악화하자 임화수를 마지못해 불구속 입건했던 경찰은 조사를 진행하는 내내 “미약한 폭행이 있긴 했으나 양자가 합의한 것으로 안다”며 가해자를 두둔하기 바빴다. 한편 김승호, 최무룡 등 현역 배우 7명은 “임화수에 대한 관대한 조처를 부탁한다”며 법원, 검찰을 드나들었다. 결국 임화수에게 내려진 벌은 벌금 3만환이 전부였다. 괜히 호랑이를 건드려 성나게 만든 것 아니냐는 걱정어린 힐난이 영화계에 일찌감치 돌았고, 결국 이는 맘에도 없는 과도한 충성을 낳았다.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한 임화수는 구타사건 발생 한달 뒤에 영화인들의 추대에 따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직에 오른다.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계, ‘펜대 굴리던’ 기자라고 안전할 리 없었다. 이 무렵, 모 영화 월간지 K기자가 ‘베스트10’의 투표를 조작했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청부받은(?) 깡패 20여명에게 두들겨 맞는 일도 있었다. “지금이야 상상 못할 일이지만 그때는 비일비재했어. 영화사 가면 야, 이 개XX야. 욕하고 노골적으로 패기도 하고.” 1950년대 말 영화잡지, 일간지 문화부에서 기자로 일했던 강대선 감독은 <나는 고발한다>(1959) 제작 당시 악극단 출신 배우들을 기용하고 싶지만 한국영화배우협회 소속 배우들의 눈총 때문에 곤란해하던 감독, 제작자의 하소연을 듣고 기사를 썼다가 배우 이XX, 윤XX 등에게 끌려가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에서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말한다. “한두번이 아니야. 맞은 게. 나만 해도 세번이나 그랬다고. 나중에 사과를 받긴 하지만 그럼 뭐하냐고.”
구라 못 치면 맷집으로 버텨야 했던 시절, 충무로 3가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은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만큼은 아니더라도 부적절하고 일방적인 활극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 사무실을 아지트 삼아 활개치던 임화수, 그 임화수를 꼬붕 삼은 자유당 정권, 그리고 그 아래서 끽소리 못하고 죽어 지내야 했던 영화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다음에.
참고자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1958∼1961>(한국영상자료원 엮음, 비매)<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화의 르네상스2>(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만인보 21>(고은,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