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30일자로 KBS 2TV <미녀들의 수다>가 월요일 밤 11시대로 방송시간 이동을 명받았을 때 자연스럽게 방송가의 관심은 기존 ‘수다왕’이자 앙케트 토크쇼로 닮은꼴인 SBS <만명에게 물었습니다 야심만만>(아래 <야심만만>)과 맞붙어 어떤 결과를 낼지에 기울었다.
두 프로그램의 성적은 시청률 10%대를 턱걸이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형국인데 결론은 외국인 미녀들의 어눌한 수다가 스타들의 노련한 수다를 눌렀다는 한줄로 성급히 간추려지는 것 같다. 방송 6개월차 새내기인 <미녀들의 수다>가 ‘뜨는 해’라면 방송 경력에서 네살 많은 고참 <야심만만>은 ‘지는 해’라는 것이다.
다양한 캐릭터의 다국적 미녀들한테 시선을 산뜻하게 ‘샤워’하고,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그들의 천진하고 날카로운 지적에 가끔 뜨끔해하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또 미녀들의 올바르지 못한 우리말에서 그들이 교본으로 삼았을 우리네 언어문화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각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강의실형 계단식 좌석 배치에 곱게 차려입고 앉은 외국인 여성들의 수다를 먼발치서 감상하는 것보다 아직은 익숙한 스타들의 ‘원탁의 수다’에 동참하는 데 더 미련이 남는다.
여기에는 우리도 두 자리의 방송 햇수를 자랑하며 켜켜이 전통을 이어가는 장수 예능 프로그램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맹목적인 바람도 들어있지만, 방대한 사전조사를 기반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답을 순위로 매겨 쪽집게의 공감을 자아내고, 스타의 솔직한 수다와 맞물려 극적인 화제성도 엮어가는 <야심만만> 특유의 틀거리가 여전히 산소호흡기로 겨우 연명할 만큼 낡은 것이라고 선언하기가 주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심만만>이 시청률에서 <미녀들의 수다>에 자존심을 내준 지난 5월7일 방송분을 복기해봤다. 류시원, 김진표, 아이비, 안재모, 허영란 등이 게스트로 나왔고, ‘사랑하면서 연애 폐인이 됐던 때는 언제냐’가 첫째 주제로 제시됐다. 이 가운데 15분 이상이 기혼녀를 짝사랑했다는 등의 사연을 털어놓은 류시원의 하염없는 얘기에 할애됐다. 그의 롱 토크에 하품하는 다른 게스트들, 그의 얘기를 어떻게 편집할까 고민하는 PD의 모습도 군데군데 틈입해 ‘우리도 그 얘기가 지루했노라’고 시청자를 향해 선수를 쳤다. 나름 지루한 얘기를 요리하는 영리한 양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일단 긍정해본다. 그런데 갈수록 태산이라고 다른 게스트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MC 강호동이 “그래서 답은 무어냐”고 채근하지 않으면 본제로 돌아오지 않을 만큼, 저마다 각자의 사랑담을 풀어내는 데 도취돼 있었다. 심지어 게스트들이 다 답을 맞히지 않았는데도 설문조사 결과를 시간 관계상(?) 한번에 화면에 쭉 나열하는 것으로 처리됐다. 경쟁작이 옆자리에서 야심만만한 기합을 넣고 있는데 정작 <야심만만>은 참신한 얘깃거리가 얼마나 바닥이 났는지, 무기력한 MC의 추임새와 스타들의 사적인 수다가 단순 나열될 때 얼마나 지리멸렬할 수 있는지 노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야심만만> 가라사대 사랑은 영원한 중독성의 테마다. 그것과 관련한 스타의 신변잡기 토크 역시 언제나 시간 낭비의 시시껄렁한 소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방송을 통해 재미와 공감의 공공재로 인정을 받으려면 콩트로 전화해 각색의 손맛을 가미하든, 앙케트 결과로 소통을 시도하든, 시청자를 배려하고 대상화한 긴장감있는 구성 아래 조리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래야 시청자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소외되지 않은 채 무릎도 탁 치면서 관여하고 싶어진다. 아류 프로그램을 양산할 만큼 독자적인 그릇을 지녔던 <야심만만>은 쇼킹 고백 따위의 내용에 갈증을 느낄 게 아니라 그것을 담을 자기다움의 형식미를 다시 딴딴히 다질 시기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