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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밀양> ① 비밀의 빛, 밀양으로 가는 길

허문영, 이창동 감독의 신작 <밀양>을 보고, 만나고, 쓰다

홍상수는 즐거움을 찍고, 이창동은 괴로움을 찍는다. 물론 홍상수가 희망을 찍고 이창동이 절망을 찍는다는 말이 아니다. 상식적인 용법으로는 차라리 그 반대에 가깝다. 홍상수는 현재에 도착한 세계만을 믿고, 이창동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 혹은 같은 의미에서, 지나가버린 시간을 믿는다. 홍상수는 영화적 기호의 물질성에 몰두하며, 이창동은 미끈한 기호 뒤로 사라졌거나 오지 않은 의미를 붙잡으려 한다. 그 결과, 홍상수의 이야기는 충만으로 향하고, 이창동의 이야기는 결여로 향한다.

공통점은 둘 다 거짓말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거짓말의 범위가 조금 다르다. 홍상수는 의미 자체와 싸운다. 그는 의미작용 자체를 불신한다. 그에게, 비유컨대, 말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이다. 이창동은 무의미와도 싸운다. 그는 무의미도 거짓말의 일종이라고 본다. 그에겐 거짓말이 아닌 말이 여기 아닌 어딘가에 있다. 요컨대 의미가 비워져가는 자리를 영화적 기표들의 활력이 채워가는 과정이 홍상수의 서사라면, 이창동의 서사는 오염된 의미들을 끝내 소진시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창동의 서사를 듣고 있기 힘겨운 이유는 그가 소진을 중간에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야기가 끝나고도 소진은 끝나지 않는다. 의미는 바닥나고 인물은 탈진한다. 우리는 추락을 거듭해 흉하고 딱딱한 바닥과 결국 마주한다. 아주 희미한 반짝임이 있었다. 아니 없었을지 모른다. 말 그대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말할 수 있는 의미의 전부인가? 이창동은 동요없이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이야기를 하는 이유다. 이창동 영화의 괴로움을 받아들인다면, 소진된 거짓 의미들에 더이상 기댈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희미한 반짝임마저 사라져서는 살아낼 수 없다고 당신의 몸이 말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

이창동의 네 번째 장소 밀양에 신애(전도연)라는 여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내려와 새 삶을 시작한다. 밀양은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이며, 그곳에서 신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센터를 하는 종찬(송강호)이 신애의 곁에 머무르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홀로 버텨내려 한다. 그러다 아들은 유괴당하고 곧이어 시체가 되어 돌아오며 범인은 금방 잡힌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스포일러가 될 수 없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녀는 버텨낼 수 있을까.

<밀양>은 유괴를 언급하지만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유괴의 과정도 유괴된 아이의 시신도 볼 수 없으며, 아이의 절규도 유괴범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사건이 종료된 뒤에야 체포된 유괴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애의 몸과 말을 통해서 그 과정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밀양>은 유괴라는 행위와 살해에 관심없다. 오직 그 결과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흐느낌과 구토와 떨리는 몸과 통곡과 광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게 전부다.

“왜 고통을 다루는가”라는 질문에 이창동은 “고통을 다루는 게 즐거움을 다루는 것보다 덜 불편해서”라고 대답했다. 이창동은 <밀양>에서 지금까지처럼 가해자가 존재하는(그것이 익명의 집단이건 아니면 특정한 인물이건) 고통을 다룬다. 그러나 그 방식에서 전작을 훌쩍 뛰어넘는다. <밀양>은 고통받는 주인공을 드러내면서, 고통을 영화라는 매체에 담아온 이창동이 자신에게 혹은 자신의 영화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창동은 먼저 자신에게 묻는다. 고통을 재현한다는 게 가능할까. 혹은 정당할까. 이 질문을 경유해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할까.

관객이 즉각적인 고통을 느끼도록 혹은 느낀다고 믿도록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해행위 즉 폭력을 육체적으로 보여주면 된다. 그 효과는 피해자가 관객이 동일시할 만한 인물일수록 더 강해진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영화에서 고통을 유발한 폭력이 재현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게 표현되더라도 ‘참을 만한’ 자극이 된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극장에 들어와 안전한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에서 관음증의 탐식성은 지독한 것이어서, 피해자의 고통의 자리에서 묘사된 폭력조차 은밀하게 ‘즐길 만한’ 것이 된다. 9·11 동영상에서 경험했듯 허구의 서사로 재현된 폭력이 아니라 기록된 실재의 폭력조차 이 관음증의 탐식을 피해가지 못한다.

최악의 사태는 영화의 재현된 폭력을 감상하고 나서,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안전한 분노가 그 이해의 증거로 내밀어진다. 이른바 고발성 영화에서 종종 일어나는 전도 한 가지는, 고통의 이해가 분노를 낳는 게 아니라 안전한, 그래서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거의 잊혀질 분노가 고통의 이해를 사후 승인하는 것이다. <그놈 목소리>를 본 그 수많은 관객 중 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그 영화를 즐기기 위해 쓴 비용을 범인 체포를 위해 쓰지 않는다. 이것은 관객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의 윤리의 문제다. 또한 폭력의 재현을 변호하는 데 동원된 언어의 문제다.

이창동이 지켜온 재현의 윤리는 재현된 ‘나’의 손상된 육체나 일그러진 삶을 전시함으로써 가해자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죄의식, 혹은 김혜리가 말한 공범의식(<씨네21> 594호 ‘김혜리가 만난 사람’)에 있었다. 그러나 <밀양>에서 폭력은 아예 재현되지 않는다. 이건 심각한 결단이다. 재현된 폭력을 접해온 우리의 관성으로는 여기서 분노의 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의 이해라는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사후 승인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창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공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첫 시퀀스에서 왜 신애가 아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지, 그녀의 죽은 남편은 정말 바람을 피웠는지, 그리고 정말 밀양으로 온 이유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신애라는 여인의 내력도 동기도 잘 알 수 없다. 게다가 땅 살 돈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그녀의 언행은 유괴범을 끌어당기는 한 요인이 되었다. 신애는 평범하되 사랑스러운 범상함을 갖고 있지 않은, <귀여운 여인>(체호프)의 올렌카처럼 그저 약간 이상하고 딱한 여인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 빛이 스며드는 법

이 여인이 끔찍한 불행을 당했다는 말만 듣고, 우리는 그 여인의 오열과 통곡, 종교에 몰두한 뒤 갑자기 천사처럼 바뀐 얼굴, 그러다 다시 종교를 증오하고 미쳐가는 모습을 차례로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이창동은 극중 인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이해하겠지, 라고 단 한번도 달콤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밀양>은 유괴도 신앙도 광기도 언급하지만 어느 것도 다루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밀양>은 고전적 서사를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영화의 거짓말하는 능력을 경유해, 동시대 영화와 동시대의 삶을 말하는 언어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는, 그러나 위장된 대답에 휩싸여 죽어가던, 이 질문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대답들이 모조리 실패했을 때, 비로소 되살아난 질문, 그러나 여전히 불가능한 대답, 그 어둠 속에 흘러드는 희미한 비밀의 빛. ‘밀양’은 그곳에 있다.

첨언컨대, <밀양>은 이 글의 딱딱함과는 무관하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어쩔 수 없이 어떤 육중한 감정을 안고 있게 된다. 이창동은 극적 장치들을 거의 버리고서, 그리고 잔인하게도 전도연이라는 가냘픈 여배우의 육체에만 서사 전체의 무게를 실으면서, 놀랍게도 그것을 해낸다. 전도연은 연기했다기보다는 이 가혹한 서사 안에서 그저 버텨냈다는 인상을 준다. 그 버텨냄이 그녀의 어떤 연기와도 다르게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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